전국 각지에 남은 복날 음식의 지리적 흔적과 문화적 맥락

이미지 생성: ChatGPT (OpenAI) 제공 / Cook&Chef 제작
[Cook&Chef = 이경엽 기자] 오늘(30일)은 중복이다. 해마다 삼복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이 날, 전국 대부분의 식당과 마트는 삼계탕 마케팅으로 붐빈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복날엔 삼계탕’이란 공식이 마치 민속처럼 굳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국 어디서나 삼계탕만 먹었을까? 지역의 기후와 생업, 재료에 따라 복날 밥상은 전혀 다른 모양새로 펼쳐져 왔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지역성과 계절성이다. 각 지역에는 그 땅의 생태와 사람의 생활, 노동과 기억이 깃든 복날 음식이 남아 있다. 복날 음식은 단순한 고단백 식사가 아니라, 한 지역이 여름을 버티는 방식이었다.
2025년의 중복, 다시 지역의 밥상으로 시선을 돌린다. 전통 음식은 단지 유산이 아니라, 오늘날의 식문화와 식재료 소비, 지역 경제를 다시 보게 만드는 거울이다.
“삼계탕만 복날 음식일까?”...지역에 따라 다르게 먹던 여름 밥상
전통적으로 삼복은 한 해 중 가장 더운 시기다. 조선시대에도 "초복에는 죽이고, 중복에는 삶고, 말복에는 먹는다"는 속담이 있었을 정도로 여름철 보양은 중요한 의례였다. 그러나 ‘보양식=삼계탕’이라는 공식은 비교적 최근에 굳어진 문화다. 1960~70년대 양계산업이 확장되면서 도심에서도 쉽게 닭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이후 프랜차이즈 확산과 광고 마케팅을 통해 삼계탕은 복날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그 이전에는 지역마다 복날에 즐기던 음식이 모두 달랐다. 기후와 지형, 생업의 차이에 따라 보양식은 자연스럽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복날에 무엇을 먹느냐는 단지 영양학적 선택이 아니라, 그 지역의 생태적 조건과 생활문화의 총체였던 셈이다.
전북 진안의 ‘홍삼탕’, 삼 대신 ‘홍삼’… 고산지대의 보양 전략
전북 진안은 대한민국 대표 인삼 산지 중 하나지만, 이곳에서 더 흔한 건 ‘홍삼’이다. 고산지대의 기온 차가 큰 진안에서는 인삼보다 가공된 홍삼이 더 오래 보관되기 쉽고, 홍삼축제가 열릴 정도로 지역 인프라가 갖춰져 있다.
진안에서는 복날 즈음 ‘홍삼 닭백숙’ 또는 ‘홍삼 돼지수육’이 자주 등장한다. 삼계탕과 유사한 형태이지만, 향이 강한 생삼 대신 쓴맛과 단맛이 공존하는 홍삼을 우려낸 육수가 중심이 된다. 노인 인구가 많은 지역 특성상 뼈째 끓인 음식보다 부드럽게 삶은 고기와 탕류를 선호하는 경향도 반영되어 있다.
진안의 복날 음식은 지역 특산물을 활용한 경제성과 건강식으로서의 실용성을 동시에 갖춘 사례다.
전남 구례의 ‘염소탕’, 노동집약적 농촌의 고단백 보양식
전남 구례는 지리산 자락에 위치해 있고, 전통적으로 염소·토종닭·오골계를 많이 길렀다. 특히 염소는 높은 단백질 함량과 풍부한 미네랄로 여름철 기력 회복에 효과적이라는 전통적 믿음이 있다. 구례에서는 복날마다 염소탕을 끓여 마을 사람들과 나눠먹는 풍습이 남아 있으며, 일부 식당은 ‘염소 도가니탕’, ‘생염소 수육’을 여름 한정 메뉴로 판매한다.
염소고기는 일반 육류보다 비린내가 강하고 조리시간이 길어 가정보다는 식당이나 마을 행사 중심의 보양식으로 소비된다. ‘염소는 뜨거운 음식이니 복날에 먹어야 더 좋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역에서는 복날의 타이밍도 중요하게 여겨진다.
경북 안동과 경남 밀양의 ‘오리백숙·미꾸라지탕’, 논농사의 경험이 만든 여름 보양의 공식
경상도 내륙 지역에서는 복날 음식으로 오리백숙과 추어탕이 자주 등장한다. 논농사를 주로 짓는 이 지역에서는 여름철 벼 이삭이 패기 전 가장 더운 시기에 기력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했고, 그에 맞는 고단백 식재료로 오리와 미꾸라지가 선호되었다.
오리는 소화가 잘되면서도 불포화지방산이 풍부해 여름철 건강식으로 적합하다는 인식이 강했고, 미꾸라지는 ‘논물 속 약재’로 불릴 만큼 자양강장에 좋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특히 안동과 밀양 등 일부 지역에서는 미꾸라지를 갈지 않고 통째로 끓이는 ‘통미꾸라지탕’을 고수해, 지역 특색이 드러난다.
경북 상주·청도 등지에서는 복날에 추어탕과 민물매운탕을 동시에 끓여 이웃과 나눠 먹는 풍습이 있으며, 장날을 중심으로 식재료 판매량이 급증하는 흐름도 있다.
강원도 인제·양구의 ‘황태국’, 더위보다 ‘허기’를 막는 고단백 저지방 식사
강원도 산간 지역에서는 복날에도 삼계탕이나 백숙보다 황태국이 인기다. 조리 난이도가 낮고, 저장성이 좋으며, 고단백이면서도 기름기가 적어 더위에 지친 속을 보호해주는 식사로 각광받는다.
산간 지역 주민들은 무더위보다도 기온 변화와 식량 부족을 더 두려워했기에, 건조 보존 식품인 황태를 중심으로 여름철 밥상을 차렸다. 특히 양구, 인제, 태백 등지의 향토식당에서는 황태해장국을 복날 메뉴로 고정 판매한다.
황태는 뼈와 가시를 모두 발라내고 국물에 담기 때문에, 노인이나 아이들도 소화에 무리가 없으며, 된장이나 고추장을 푼 국물을 넣어 각 가정만의 방식으로 응용되기도 한다.
시장과 계절의 교차점, 민속의 흔적이 남아 있는 복날의 장터와 시장
복날 즈음 열리는 장날은 단순한 상업 활동을 넘어 지역민들의 식재료 소비와 음식문화가 만나는 지점이다. 전북 장수에서는 토종닭과 염소고기, 전남 순천에서는 한약재와 여름채소, 강원 정선에서는 황태와 곰취가 복날을 앞두고 몰려든다.
특히 중복이 다가오는 시기에는 “이 날 먹어야 가을까지 탈 없이 산다”는 속담과 함께, 보양식 장보기를 하려는 주민들이 늘어난다. 일부 장터에서는 장터 국밥집에 복날 한정 ‘염소탕’ ‘삼계탕’ 간판이 걸리며, 지역 관광객을 유도하는 ‘로컬푸드 장날 투어’ 프로그램도 생기고 있다.
이는 복날 음식이 단지 ‘먹는 것’을 넘어서, 지역 경제와 공동체 문화, 세대 간 기억의 연속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복날 음식은 한 마을의 이야기...복날, 다시 ‘로컬’의 시대로
복날은 단순히 한 그릇의 영양식이 아니다. 계절을 극복하기 위한 민속 지혜였고, 지역의 식재료와 조리 관습이 응축된 결과물이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며 획일화된 복날 음식 문화가 자리 잡았지만, 오늘날 기후위기, 농촌 소멸, 지역 식재료의 가치 재조명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지역의 복날 음식은 다시 의미를 얻고 있다.
중복을 앞두고 다시 묻는다. “복날은 삼계탕만 있는 날인가?” 전국의 복날 음식은 각 지역의 기후와 생태, 노동과 기억이 만들어낸 ‘여름의 음식문화’다. 복날의 밥상에서 우리는 지역의 삶을, 계절의 흐름을, 공동체의 지혜를 다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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