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기리스시는 원래 에도의 향토음식
- 고급화한 ‘니기시스시’를 고도성장기의 접대용 등으로 명맥을 유지해

[Cook&Chef 최인 칼럼니스트] ‘니기리스시’는 원래 ‘에도의 향토음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국 방방곡곡 스시집이 없는 곳이 없을 만큼 퍼져 있다. 가장 새롭게 등장한 형태이지만 이렇게 일본 전국을 제패하게 된 것은 몇 가지 요인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하나는 메이지유신정부가 서구 문명에의 추종을 서두른 나머지 전통문화와 지방의 토착문화에 대해 부정적이었다는 것이다. 유신정부는 ‘동경어’를 표준말로 설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도쿄(東京)의 문화를 표준으로 삼았다. 스시라고 하면 ‘니기리스시’가 표준이 되었다. 이러한 가치관은 근대화의 물결과 더불어 점차로 전 국민들에게 스며들어갔다. 그리고 1922년의 관동대지진은 도쿄(東京)을 허허벌판으로 만들었고 이재민의 수십 퍼센트를 지방으로 이주하게 했다. 그 중에 ‘니기리스시’ 조리사도 섞여 있어 ‘니리기스시’의 조리기술의 지방 진출을 촉진하게 되었다.

1947년의 ‘음식영업긴급조치령’은 더 한층 결정타가 되었다. 이것은 식량난과 더불어 요식업을 사실상 금지하는 요인이었으며 도쿄(東京)의 스시조합이 한 홉의 쌀을 가져오면 10개의 스시를 만들어주는 행위를 ‘음식업’이 아니라 ‘위탁 가공업’이라고 주장하여 당국도 이를 인정하게 함으로써 스시상의 이와 같은 행위를 정당한 상행위로 계속 할 수 있었다. 이에 준하여 각지의 스시조합도 같은 허가를 받았지만 그때에 ‘니기시스시 몇 개’의 항목도 답습했다. 그래서 어느 지역에서나 ‘니기리스시’가 아니면 정당한 장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이르러 한 개의 쌀 한 작(勺) 크기의 ‘니기시스시’가 전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2차 대전 후 식량사정이 호전되어 ‘니기리스시’ 이외의 스시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되어 고도 성장기의 도래로 각지의 전통문화는 급속하게 쇠퇴했다. 여성의 사회진출과 핵가족화 생활파탄의 변화들이 사회변화와 더불어 가정에서 스시를 만드는 기회도 적어지고 스시는 더욱더 구입품 일변도로 기울어졌다. 그 받침대가 된 것이 각지에 뿌리 내렸던 ‘니기리스시’였다. 석유파동 이후의 저성장기가 되자 지방문화의 재발견을 부르는 계기가 되었으나 ‘니기리스시’의 인기는 여전할 뿐 아니라 오히려 값싼 회전스시가 급성장하여 테이크아웃 해가는 등 시민들의 생활에 깊이 파고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은 지난날 야다이에서 호평이었던 ‘니기리스시’의 복권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게다가 한편에서는 고급화한 ‘니기시스시’를 고도성장기의 접대용 등으로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그 존재가치가 확고해졌다. 싼값에 대중적인 가게와는 다른 방향으로 특화되어 손님에게 특권의식을 지니게 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것은 ‘마쓰가스시’의 경우와 유사한 점이 있다. 저성장기에 다소 침체한 느낌이 없지 않았으나 쇼와 말기의 팽창시절의 고급품 지향은 대중의 지지를 받아 또 다시 인기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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