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는 하꼬스시가 문제였다. 그것을 만드는데 쓰이는 시간과 노력등 즉 용기에 넣고 누르게 되면 생선이 으깨지는 것이 싫었던 요호에가 생각해 낸 것이 현재 우리들이 먹는 ‘니기리스시’와 같은 것이었다. 당시에는 ‘니기리하야쓰께’라고 칭했다는 것이다. (고이즈미 세아사브로 지음. ‘가정초밥의 절이는 법 – 1910’) 이 스시는 순식간에 히트를 쳐 가가게 크게 번창했다. 1856년의 ‘부소료간 즈쇼’에는 ‘붐벼서 기다리다가 지치다. ’요호에스시‘ 손님도 양손을 마주잡고 칭찬하다’라는 가락까지 생겼다. 그 인기는 에도뿐만 아니라 이미 분세이말기(1820년대 후반)에는 마침내 오사카에도 ‘니기리스시’가게가 생겼다고 ‘모리사다만고’는 전하고 있다.
1877년의 내국권업박람회의 출품작을 그린 가와바타 교큐쇼의 스시그림은 당시의 ‘요호에스시’가 제공한 니리시스시를 그린 것으로 현재의 니기리스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러나 크기는 지금보다 2-3배는 되었다. 또한 ‘가정초밥 절이는 법’에는 요호에스시의 재료 손질법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으나 모두 소금이나 식초로 절이고 데쳐서 스시를 만드는데 쓴다고 되어 있다. 아무리 에도마에스시에 가깝다고 해도 신선도를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생선살을 날것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상당히 시일이 지나서 냉장고가 보급된 이후이다.
일찍부터 스시가 노첨에서 흔하게 거래되었다. 에도시대의 자료에도 노천에서 스시를 파는 상인과 스시를 파는 좌판을 그린 그림은 1729년의 그림 문답감. (발효스시를 그린 것 같음)을 비롯하여 1815년의 그림책 ‘에도선물’, 1786년 그림책 ‘에도의 벼슬’, 1854년의 ‘난바쇼큐닌 우타아와세’등 다수가 있다. 그러나 이들 스시상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값이 싼 스시를 팔았다는 것으로 햐야스시의 등장으로 스시의 다양화가 이루어져 새삼스레 세인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에도 중기 이후 남성의 인구 비중이 높고 날품팔이 임금 노동자수가 많아진 에도의 거리에서는 저렴한 음식업이 번창하였으며 스시상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밖에도 고정적인 점포를 차린 스시집이 있었다. 1682년의 ‘고메이슈’와 1690년의 ‘인륜훈몽도집’에 그려진 스시집은 모두 발효스시였지만 점포를 얻어 장사를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80년대에는 에도에 두집 밖에 없었으며 1세기 후에도 20여집에 불과 했던 것 같다. (1787년 ‘에도마찌니카구이모노주호기) 거기다가 스시를 테이크 아웃해 갈 수도 있고 배달 전문의 가게로서 이른바 ’식당‘ 기능을 갖춘 곳은 많지 않았다.
마쓰가스시의 움직임을 추종한 것이 요호에스시 등 다른 스시상들의 고급화 경향이었다. 사치를 금지시킨 “덴뽀의 개혁 (1841-1843) 때는 무려 200명의 스시상인이 처벌 되었다고 한다. (모리사다만고) 그러나 고급스시집을 ‘이름난 곳’으로 거론되고 풍자 시로 읊어진 것으로 미루어 그와같은 고급화 노선은 서민 정서에 역행한 것이라 역으로 서민들은 이러한 스시상이 선망의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급스런 스시상들이 망하지 않고 오히려 고급화가 더욱 진행되었다. 명치시대의 자료에는 고급요정에 버금가는 스시집이 여러곳 그려져 있다. (1884년의 ‘도쿄 명가번창도록’, ‘도쿄 자랑면물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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