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ok&Chef = 이경엽 기자] 햇살이 투명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 빛은 더 이상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 아직 여름의 숨결은 매미 울음 속에 남아 있지만, 땅의 숨소리는 분명 달라진다. 입추(立秋), 여름과 가을이 입을 맞추는 날. 계절은 바람의 결로 먼저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절기를 지나면 벼 이삭은 고개를 숙이고, 포도송이는 어둠 속에서 달콤함을 농축한다. 바싹 마른 풀잎과 눅눅한 흙내음 사이로 가을이 숨어든다. ‘입추에 벼 자라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는 말이 괜한 옛이야기만은 아니다.
입추, 계절의 변곡점을 짓다
오늘(7일)은 입추다. 24절기 중 열셋째 절기인 입추는 농사력으로 보면 본격적인 결실의 시기를 알리는 신호탄이다. ‘입추 전 10일의 날씨가 그 해 가을 농사의 길흉을 좌우한다’는 속설이 있을 만큼, 이 시기의 날씨는 예로부터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하지만 오늘 서울의 낮 기온은 33.2도, 강릉은 35.5도까지 오르며 ‘가을의 입맞춤’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기상청 기후데이터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입추 전후의 평균 기온은 점점 더 ‘여름답게’ 유지되고 있다. 이상기후는 이제 절기의 감각마저 바꾸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추는 ‘계절의 경계’다. 자연은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식재료의 시기를 준비한다. 한식진흥원은 8월을 “여름과 가을이 겹치는 풍요의 문턱”이라 부르며, 입추 즈음 가장 맛이 오르는 식재료 6가지를 ‘입맛 회복 음식’으로 추천하고 있다. 이들은 단지 맛있는 식재료가 아니라, 제철성과 효능 면에서도 절기에 잘 어울리는 선물들이다.
입추가 추천하는 제철 6선
① 포도 – 단맛으로 기력을 붙들다
탱글탱글한 과즙을 머금은 포도는 지친 몸에 에너지를 더하는 대표 과일이다. 항산화 물질인 레스베라트롤이 풍부해 면역력 강화에 도움을 준다. 국내에 본격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1906년부터이며, 현재는 거봉, 피오네, 캠벨얼리 등 다양한 품종이 고당도의 과일로 여름과 가을 사이를 채운다.
한식진흥원은 포도의 풍미를 살리는 방법으로 껍질째 섭취하거나 냉동해 샤베트 형태로 즐기는 것을 권장한다. 껍질에는 항산화 성분이 집중돼 있고, 얼리면 더욱 청량한 디저트로 완성된다.
② 오이 – 속까지 시원한 수분 채소
오이는 95%가 수분으로 구성된 채소로, 체내 수분 보충과 노폐물 배출에 탁월하다. 진정 효과도 있어 여름철 천연 해열제로 손꼽힌다. 특히 물가가 불안정한 요즘, 가격 대비 활용도 높은 대표 채소다.
한식진흥원은 오이를 활용한 대표 음식으로 오이냉국을 제안한다. 얇게 썬 오이를 간장과 식초로 간을 맞춘 후 찬물을 붓고 고추와 파를 더하면, 더위에 지친 입맛을 되살리는 시원한 한 그릇이 된다.
③ 풋콩 – 녹색 속 단맛, 한입 건강
풋콩은 아직 여물지 않은 덕에 단맛이 진하고, 대두에는 없는 비타민 C가 풍부하다. 철분과 단백질도 높아 간단히 삶아 간식으로 먹거나 샐러드에 넣어도 훌륭하다.
한식진흥원은 풋콩을 밥에 넣어 지어 먹는 ‘풋콩밥’을 계절밥상으로 추천한다. 갓 수확한 햅쌀과 풋콩이 만나면 입추 이후의 풍미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식탁이 완성된다.
④ 가지 – 보랏빛 슈퍼푸드
가지의 보랏빛은 항산화 성분 안토시아닌과 나스닌이 풍부하다는 증표다. 세포 노화를 억제하고 혈관 건강을 돕는 가지는 쪄서 나물로 무쳐도, 된장찌개에 넣어도 부드러운 풍미를 살릴 수 있다.
한식진흥원은 가지의 항산화 성분을 보호하기 위해 지나친 고온 조리보다는 찜이나 된장국에 활용하는 방식을 권장한다.
⑤ 고구마순 – 줄기까지 챙기는 풍미
고구마의 뿌리만 주목받지만, 줄기인 고구마순 역시 풍부한 영양을 갖춘 식재료다. 식이섬유와 폴리페놀이 풍부해 장 건강과 다이어트에 도움을 준다.
한식진흥원은 고구마순을 된장이나 간장으로 조리해 반찬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권장하며, 섬유질과 감칠맛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절기 반찬으로 꼽는다.
⑥ 깻잎 – 향으로 먹는 영양 한 장
깻잎은 특유의 향으로 입맛을 깨우고, 철분과 칼슘이 풍부해 ‘식탁 위의 명약’으로 불린다. 시금치보다 두 배 이상의 철분과 다섯 배 이상의 칼슘을 함유하고 있어 무더위로 떨어진 체력을 보충하는 데 이상적이다.
한식진흥원은 깻잎을 장아찌나 쌈용으로 숙성시켜 활용하는 방식이 영양과 풍미를 모두 살릴 수 있는 조리법이라고 소개한다.
절기란, 체감이 아니라 감각이다...오늘 저녁, 입추를 차려보자
8월 초, 폭염 속에 맞이한 입추는 ‘가을이 어디 있냐’는 반문을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기는 단순히 온도를 가르는 선이 아니다. 절기는 계절을 감각하는 기준이며, 삶의 리듬을 정리하는 전통이다.
절기가 중요한 이유는 그 시점이 아니라 그 시기를 어떻게 살아내는지에 있다. 시장은 계절의 창이고, 식재료는 시간의 언어다. 지금 이 시기, 포도 한 송이와 오이 한 접시를 식탁에 올리는 일이야말로, 입추를 느끼는 가장 오래된 방법일 것이다.
입추를 식탁 위에서 실감하고 싶다면, 오늘 저녁은 계절의 혀끝을 따라 구성해보자. 무더위 속에서도 입맛을 되살리는 오이냉국은 수분과 영양을 동시에 채워주는 대표 여름 음식이다. 여기에 풋콩을 넣어 지은 풋콩밥은 밥 위에 녹색 활력을 더하며, 절기의 감각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반찬으로는 깻잎장아찌가 제격이다. 짭조름하면서도 향이 살아 있어 떨어진 입맛을 자극한다. 된장으로 끓인 가지된장찌개는 부드러운 식감과 항산화 효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건강한 국물 요리다. 마지막으로, 껍질째 얼린 포도 한 송이를 디저트로 곁들이면 입추의 맛은 완성된다.
절기는 지나가는 날이 아니라, 차려내는 식탁이다. 입추는 결국, 오늘의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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