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ok&Chef = 노고은 기자] 여름 한낮, 찬물에 띄운 가지냉국 한 그릇을 떠올려본다. 살짝 쪄서 결대로 찢은 가지에 식초와 간장을 더하면, 더위에 가라앉았던 입맛이 조용히 깨어난다. 미끈하고 부드러운 그 식감을 두고 누군가는 밋밋하다 했지만, 가지를 아는 사람은 안다. 가지는 제맛을 내세우는 채소가 아니라, 곁들이는 것의 맛을 끌어안아 제 것으로 만드는 채소라는 것을.
가지의 고향은 인도 북동부에서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일대로 알려져 있다. 토마토·감자·고추와 한 식구인 가지과 식물로, 재배의 역사는 까마득해서 짧게 잡아도 2천 년을 훌쩍 넘는다고들 한다. 흥미로운 점은 가지가 어느 한 곳에서만 길들여진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인도와 중국 남부·동남아 양쪽에서 일찍부터 길러진 채소여서, 그 출발점도 한 군데로 좁혀지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기록을 따라가 보면 가지의 시간은 한층 또렷해진다. 중국의 옛 농서에는 일찍부터 가지 재배법이 꼼꼼히 적혀 있었고, 거기서 가지는 실크로드와 아랍 상인들의 손을 거쳐 중동을 지나 유럽으로 건너갔다고 전해진다. 우리 땅에서도 가지는 낯선 손님이 아니었다. 조선 시대의 여러 음식책에 가지를 다루고 갈무리하는 법이 전하고, 신사임당의 <초충도>에 보랏빛 가지가 그려질 만큼 가지는 일상 가까이에 있었다.
한국의 부엌에서 가지는 여름을 대표하는 채소로 자리 잡았다. 쪄서 무치고, 기름에 볶고, 전을 부치고, 냉국으로 띄우기까지—조리법은 계절만큼이나 너르다. 수분이 많고 조직이 부드러워 더운 날의 입맛을 살리는 데 제격이었고, 여름내 거둔 가지를 길게 갈라 볕에 말려두는 묵나물 문화도 여기서 비롯됐다. 겨울 밥상에 오른 말린 가지나물 한 접시에는, 사실 지난여름의 햇빛이 통째로 갈무리되어 있는 셈이다.
그 부드러운 과육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도 담겨 있다. 가지 특유의 보랏빛은 껍질에 든 안토시아닌 계열 색소에서 오고, 과육에는 폴리페놀 성분이 들어 있다. 빛깔과 맛으로만 사랑받던 채소가 이제는 몸에 이로운 식재료로도 새롭게 조명받는 이유다.
가지의 이런 성격이 가장 빛나는 요리를 하나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어향가지(魚香茄子)를 든다. 정작 생선은 한 점도 들어가지 않지만, 본래 생선 요리에 쓰던 사천의 양념, 두반장에 파·마늘·생강, 식초와 설탕을 더한 소스를 닮았다 하여 어향(魚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다만 내 부엌에서는 두반장 자리에 된장을 앉힌다.
콩을 삭혀 빚은 그 친숙한 짠맛이 고춧가루의 매움, 식초의 신맛, 설탕의 단맛에 간장 한 술까지 어우러지면, 사천의 얼굴을 한 소스가 어느새 우리 입에 한결 살갑게 닿는다. 기름에 한 번 익혀 부드러워진 가지가 다진 돼지고기와 어우러져 이 단짠신 소스를 통째로 빨아들이는 순간, 가지는 비로소 제 진가를 드러낸다. 두반장이든 된장이든 가리지 않고 곁의 맛을 통째로 끌어안는, 제 맛을 내세우지 않는 그 천성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한 접시도 드물다.
그러니 올여름, 가지 한 손을 사 보길 권한다. 아래 어향가지 한 그릇이면, 더위에 지친 여름 식탁이 한결 너그러워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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