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 이슬 위에 맺힌 가을의 맛

이경엽 기자

cooknchefnews@hnf.or.kr | 2025-09-07 09:30:46

포도에서 밤까지, 만곡의 계절이 차려내는 절기 밥상 이미지 생성: ChatGPT (OpenAI) 제공 / Cook&Chef 제작

[Cook&Chef = 이경엽 기자] 풀잎마다 맺힌 이슬이 하얗게 반짝이는 때, 오늘(7일)은 절기상 ‘백로(白露)’다. 낮에는 여전히 늦더위가 이어지지만,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감돌며 들녘은 성큼 가을빛을 띤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백로는 처서와 추분 사이, 태양의 황경이 165°에 이르는 시기”라 하며, “밤 기온이 내려가고 대기 중 수증기가 엉켜 이슬이 맺혀 가을 기운이 완연히 드러난다”고 기록한다.

백로는 농사일이 잠시 고개를 숙이는 순간이다. 고된 여름 농사를 마치고 추수를 기다리는 사이, 농부의 숨결은 차분해지고 밥상에는 가을의 첫 수확이 올라온다. 포도, 밤, 배, 석류, 은행과 같은 제철 과일이 차려지고, 햇곡식과 햇열매는 절기의 풍요를 고한다.

지명순 작가는 『당신의 식사는 안녕하십니까』에서 “백로에는 기러기가 날아오고,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가며 새들도 먹이를 저장한다”고 전하며, 이 절기를 살아낸 사람들의 식탁을 세밀히 담아냈다.

포도의 계절,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다

지명순 작가는 “내 고향 구월은 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에요”라는 영동 포도 농가의 목소리로 글을 열며, 백로 무렵 가장 달콤한 과일이 포도임을 강조한다. 포도는 단순한 과일을 넘어 ‘효도 과일’로 불린다. 『당신의 식사는 안녕하십니까』는 “포도에는 안토시아닌과 레스베라트롤이 풍부해 항산화, 항암, 노화 예방에 효과가 있고, 포도당과 과당으로 피로 회복을 돕는다”고 적었다.

포도는 가을의 햇살 아래 주렁주렁 열려 다산과 풍요를 상징했다. 조선의 백자에 포도문양이 자주 새겨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시 “백로에서 추석까지의 시절을 ‘포도순절(葡萄旬節)’이라 하여 가장 맛있는 때로 여겼고, 첫 수확한 포도는 사당에 먼저 올렸다”고 전한다. 맏며느리가 한 송이를 통째 먹는 풍습도 이어졌다.

포도는 또한 왕실에서도 귀한 과일이었다. 『당신의 식사는 안녕하십니까』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 이성계가 병세로 갈증을 느낄 때 포도로 속열을 가라앉히고 진액을 보충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포도는 단순한 맛의 과일을 넘어 진액을 보충하는 ‘약식(藥食)’이었다.

포도즙, 잔에 담긴 가을의 진액

포도를 가장 잘 즐기는 방법 중 하나는 즙이다. 지명순 작가는 포도즙을 만드는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다. “포도알을 하나씩 따서 손으로 주물러 껍질을 터트리고, 물 한 방울 넣지 않고 끓여내야 색이 맑다. 오래 끓이면 색이 탁해지니 짧게 끓이는 것이 요령”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면 포도 속살은 사라지고 꽃분홍빛 순수 100% 포도즙만 남는다.

포도즙은 단독으로 마셔도 좋지만, 요리에 활용되면 또 다른 맛을 낸다. 지명순 작가는 표고버섯을 바삭하게 튀겨 포도즙 소스를 끼얹은 ‘포도즙탕수’를 소개한다. 보라빛 진액이 표고의 풍미를 한껏 끌어올려, 늦여름의 피로를 씻어주고 가을의 생기를 전한다. 가을 밥상의 진정한 별미라 할 수 있다.

 백로의 밤, 속을 살찌우는 가을의 견과

포도가 가을의 과일이라면, 백로의 밤은 땅의 열매다. 지명순은 제자가 보내온 햇밤 상자를 떠올리며, 제자를 ‘밤톨이’라 불렀던 인연을 전한다. 밤은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라 정성과 가르침의 은유였다.

 『동의보감』은 밤을 “성질은 따뜻하고 맛은 짜며 위장을 튼튼하게 하고 신장의 기운을 북돋아 정력을 보강한다”고 기록했고, 『본초강목』은 “노인의 허약을 보완하고 위암, 당뇨, 코피에도 효과가 있다”고 전한다.

밤으로 만드는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송편과 율란이 대표적이다. 지명순 작가는 “밤은 물을 자작하게 넣어 충분히 삶은 뒤 소금으로 간하고, 꿀과 계핏가루를 더해 반죽해 밤 모양으로 빚는다”고 기록했다. 추석 차례상에 올려도 손색이 없는 율란은 밤의 단맛과 향을 그대로 간직한 가을의 별미다.

백로 무렵의 밤은 단순히 먹는 즐거움에 그치지 않는다. 스승과 제자, 부모와 자식, 가족과 공동체가 연결되는 ‘정의 매개’였다. 밤톨이 제자의 편지와 함께 온 상자가 교수의 가을을 풍성하게 했듯, 백로의 밤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상징이었다.

백로 자락의 농가 밥상, 포도와 밤의 조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백로는 고된 여름 농사를 마치고 추수까지 잠시 일손을 쉬는 때로 근친을 간다”고 적는다. 이때 여성들은 친정나들이를 했고, 중간 지점에서 만나 음식을 나누는 ‘반보기’ 풍속이 이어졌다. 백로의 밥상은 단순한 절기 음식이 아니라 관계와 정서를 담아낸 자리였다.

상 위에는 포도와 밤이 나란히 놓였다. 포도의 달콤한 즙과 밤의 고소한 속살은 여름의 더위를 식히고, 가을의 기운을 불러들였다. 포도순절의 풍요와 백로의 햇밤은 한 상에 모여 계절의 전환을 고했다.

백로의 상차림이 전하는 가을의 서곡

백로는 농사의 절정을 넘기고 수확을 앞둔 시기다. 풀잎에 맺힌 이슬은 계절의 경계를 드러내고, 밥상 위 포도와 밤은 가을의 서곡을 연다. 지명순의 기록처럼, 포도즙의 보랏빛 진액과 밤송편의 담백한 단맛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계절의 은유다.

오늘날 백로의 풍속은 희미해졌지만, 밥상 위에 놓이는 제철 음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가을을 알리는 포도의 단맛과 밤의 깊은 맛은 우리에게 계절을 음미하는 지혜를 전한다. 절기는 흐르지만, 절기의 맛은 여전히 우리 식탁에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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