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건강은 ‘약치’가 아닌 ‘식치’”… 어의의 밥상에서 조선의 건강 철학을 보다
이경엽 기자
cooknchefnews@hnf.or.kr | 2025-10-27 12:00:27
[Cook&Chef = 이경엽 기자] 지난 24일, 서울 종로구 한식문화공간 이음에서 ‘10월 한식콘서트’가 성황리에 개최됐다. 이날 강연자로 나선 전주대학교 한식조리학과 차경희 교수는 ‘어의가 쓴 음식책’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로, 조선시대 임금의 건강을 책임졌던 어의들의 기록을 통해 당대의 건강 철학과 음식 이야기를 풀어냈다.
차경희 교수는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고 떡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 후, 2000년대 초반 조선시대 식생활 데이터베이스(DB) 구축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고문헌 속 한식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전문가다. 차 교수는 최근 방영된 드라마 '폭군의 셰프'에서 영감을 받아, "역사에 기반한 픽션 속에서 어떤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것이 현대적 재해석인지 식품 조리를 전공한 사람의 시각으로 짚어보고 싶었다"며 강연의 문을 열었다.
법치보다 덕치, 약치(藥治)보다 식치(食治)를 앞세운 조선
차 교수는 먼저 조선시대의 근간이 된 유학의 '덕치(德治)' 개념을 설명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유학자들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예(禮)'로써 다스리는 '덕치'를 이상으로 삼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법으로 다스리는 '법치(法治)'는 그 다음으로 보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철학은 건강과 식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차 교수는 "질병이 생기기 전 음식으로 몸을 조섭하는 것을 '식치(食治)', 질병이 생긴 후 약으로 다스리는 것을 '약치(藥治)'라 했다"며, "성리학자들은 법치나 약치보다 덕치와 식치를 우선시했다"고 강조했다.
이는 '약식동원(藥食同源)', 즉 음식과 약의 근원은 같다는 한식의 기본 철학과도 맞닿아있다. 좋은 음식을 먹어 약을 대신하고자 했던 조선의 어의(御醫)들은 바로 이 '식치' 철학의 최전선에 있었던 건강 관리 전문가였던 셈이다.
15세기 과학자, 전순의 (세종~세조) : 『산가요록』과 『식료찬요』
차 교수는 조선시대 '식치'를 실천한 대표적인 어의로 네 명을 꼽으며, 그 첫 번째 인물로 세종부터 세조까지 4대의 임금을 모신 전순의(全循義)를 소개했다.
전순의는 2001년에야 발견된 현존 최고(最古)의 조리서이자 농서인 『산가요록(山家要錄)』의 저자다. 차 교수는 "발견 당시 앞장이 없어 저자를 몰랐으나, 책의 마지막 장에 '전순의 찬(撰)'이라는 기록이 남아있어 저자가 어의 전순의임을 알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산가요록』의 가장 놀라운 대목은 '동전양채(冬煎陽菜)', 즉 온실 기술에 대한 기록이다. 차 교수는 "1600년대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유리 온실이 최초로 알려졌으나, 『산가요록』의 온실은 이보다 170년이나 앞선 것"이라며 "심지어 남쪽을 낮고 북쪽을 높게 해 볕을 받고, 창호지에 기름을 먹인 유지를 발랐으며, 부뚜막에서 불을 때면 구들(온돌)이 바닥을 데우고, 동시에 솥의 수증기가 온실 내부로 들어가 가습까지 하는 '이중 가열 방식'의 첨단 과학 기술"이라고 역설했다. 세종이 겨울에 핀 연산홍을 보고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당시 이 기술은 획기적이었다.
또한 이 책은 1700년대까지 대부분의 조리서가 '파를 썰어 볶고...'처럼 이야기식으로 서술된 것과 달리, "술을 빚을 때 분량을 환산하는 법" 등 계량 단위를 기록한 매우 과학적인 문헌이다.
음식으로는 율무와 마 가루로 쓴 '당죽', 솔잎처럼 가늘게 썬 고기에 밀가루를 묻혀 만든 '육면(고기 국수)', 오이지를 담글 때 할미꽃 뿌리(백두옹)를 넣어 무르지 않게 하는 법 등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우무정과'는 우무를 녹여 꿀과 후춧가루를 넣고 굳힌 것으로, 차 교수는 "수업에서 재현해 본 학생들이 '먹으니 눈이 떠진다'고 할 정도"라며 "'조선시대의 박카스'처럼 임금의 기운을 바로 차리게 하는 음식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순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최초의 식이요법서인 『식료찬요(食療纂要)』도 저술했다. 이 책은 '음식으로 먼저 치료하고 약으로 다음에 치료한다'는 저자의 신념과 함께, 부인과 질환, 일상의 식재료, 계절과 체질에 맞는 제철 식재료의 중요성을 강조한, 시대를 앞서간 어의의 빛나는 업적이라고 차 교수는 평가했다.
조선의 위대한 유산, 허준 (선조~광해군) : 『동의보감』 「탕액편」
두 번째로 소개된 인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쓴 허준(許浚)이다. 차 교수는 "선조가 임진왜란 후 피폐해진 백성을 위해 왕명을 내려 시작된 이 책은, 허준이 끝까지 홀로 완성해 광해군 대에 간행된 역작"이라고 소개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음식과 약재를 다룬 「탕액편(湯液篇)」이다. 허준은 이 편에서 모든 식재료를 '사기(四氣, 네 가지 성질)'와 '오미(五味, 다섯 가지 맛)'로 나누어 체계화했다. "예를 들어 찬 성질의 돼지고기를 먹을 때, 따뜻한 성질의 새우젓을 함께 먹으면 간도 맞을뿐더러 소화가 잘되도록 돕는다는 원리"라고 차 교수는 설명했다.
또한 '정화수(새벽에 처음 기른 우물물)'를 비롯한 30여 가지 물의 종류와 쓰임새를 세세히 나누고, 밤의 보관법, 참외의 효능 등을 기록했다. 차 교수는 "허준이 훌륭한 점은 단순히 의서를 쓴 것이 아니라, 『본초강목』 등 출처를 분명히 밝히면서도, 어려운 글자가 아닌 쉬운 글자로 백성 누구나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질병 치료에 있어 '심리적인 면'을 매우 강조했다는 점"이라고 역설했다.
18세기 미식가 외교관, 이시필 (숙종) : 『소문사설』
세 번째 인물은 숙종 대의 어의 이시필(李時佖)이다. 그의 1720년대 저서 『소문사설(謏問事說)』은 '생각과 견문이 좁은 사람이 경험한 것을 기록한다'는 겸손한 제목과 달리, 조선 후기 식문화의 확장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다.
차 교수는 "이시필은 의관이면서도 중국에 외교관으로 여러 차례 다녀온 인물"이라며,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다른 나라에서 보고 경험한 '외국 음식'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대표적인 예가 '면근(麵筋)'이다. "밀기울과 밀가루를 반죽해 병(덩어리)을 만든 뒤, 물에 주물러 깨끗한 것을 취한다"는 기록은, 차 교수가 수년간 고민하다 대만 여행 중 조식 뷔페에서 '화생면근(花生麵筋)'을 보고 비로소 '글루텐(Gulten)'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한반도는 밀이 귀한 곳인데, 그 귀한 밀을 반죽해 전분은 다 씻어버리고 단백질인 글루텐만 취해 탕이나 조림을 해 먹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기록"이라고 말했다.
또한, "북경에서 맛본 '계란탕'은 돼지기름에 계란을 풀면 두부처럼 몽글하게 익는데, 참기름보다 담백하다"며 오늘날의 계란 프라이와 유사한 조리법을 소개하기도 했고, 일본의 어묵인 '가마보코(蒲鉾)'를 음차한 '가마고포'를 만드는 법도 기록했다.
이 책은 조선 음식사에서도 중요한 분기점을 보여준다. 바로 '고춧가루'의 등이다. 차 교수는 "임진왜란 이후 들어온 고추는 1600년대 초 『지봉유설』에 '주막에서 고추를 먹고 죽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생소했으나, 1715년 『산림경제』에 재배법이 나오고, 1720년대 『소문사설』에 이르러 '청해(淸醢)'라는 이름의 깍두기(깍두기)에 '새우젓을 삶아 건져 고춧가루를 넣고 버무린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고 밝혔다. 이는 고춧가루가 젓갈과 함께 김치의 맛을 내는 주재료로 자리 잡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전복, 홍합, 대하 등을 넣는 호화로운 방식의 순창 고추장과 토란을 익혀 꿀물에 재웠다가 잣가루, 밤가루에 굴린 '토란우병' 등 궁중 음식과 향토 음식의 교류를 생생히 담고 있다.
18세기 백과사전, 유중림 (영조) : 『증보산림경제』
마지막으로 소개된 인물은 조선 최장수 임금인 영조(재위 52년, 83세)의 어의였던 유중림(柳重臨)이다. 차 교수는 "영조는 스스로 건강에 매우 신경 쓴 왕으로, 실록에 '내가 좋아하는 고추장, 송이, 전복, 아치(어린 꿩)를 떠올릴 수 있으니 아직 괜찮다'고 말한 기록이 있을 정도"라며, 이런 영조의 곁을 지킨 어의가 바로 유중림이라고 소개했다.
그의 저서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년)는 50년 전의 『산림경제』를 기반으로 내용을 2배 가까이 '증보'한 책이다. 이 책은 당시 한반도에 들어온 신작물에 대한 기록이 특징이다.
차 교수는 "고구마가 감자보다 60년 먼저 들어왔다"며, "『증보산림경제』에는 이 고구마를 '감저(甘藷)'라 부르며 재배법을 상세히 기록했고, 옥수수에 대한 기록도 등장한다"고 설명했다. 고구마는 따뜻한 기후를 좋아해 강진, 해남 등 남쪽 지방에 먼저 정착했고, 뒤늦게 순조 대에 들어온 감자가 추운 강원도에 자리 잡으며 '감저'라는 이름을 가져가 버렸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덧붙였다.
또한 이 책은 약 440여 종의 음식 조리법을 담고 있는데, 이전의 책들이 주류(술)의 비중이 높았던 것과 달리 '찬물류(반찬류)'의 기록이 많아진 것이 특징이다. 가지의 보라색을 보존하기 위해 붉은 '맨드라미꽃'을 함께 넣어 담근 '가지김치' 등은 당시의 발달한 조리 기술을 보여준다.
고문헌, 현대의 콘텐츠로 다시 태어나다
차 교수는 강연을 마무리하며, 이처럼 수백 년 전 어의들이 남긴 기록이 오늘날 드라마와 같은 현대 콘텐츠의 풍부한 스토리텔링 자원이 되고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는 "드라마 '폭군의 셰프'에서 '고추장 버터 비빔밥'이 나온 것은 참기름 대신 버터를 사용한 현대적 재해석"이라며, "반면 연산군 시대에 온실에서 '고추'를 재배하는 장면은, 실제 고추가 임진왜란 이후에 전래된 것을 볼 때 100년 이상 시대를 앞서간 극적 설정"이라고 짚었다.
또한 "조선은 '우금령(牛禁令)'으로 소 도축을 금해 늙고 다친 소만 먹을 수 있었기에 고기가 질겼다"며, "드라마에서 '수비드(저온 조리)'로 고기를 연하게 한 것은, 과거 어의들이 배나 앵두나무 가지, 뽕나무 껍질(상백피) 등을 이용해 고기를 연하게 하려 했던 고민과 맞닿아 있다"고 분석했다.
차 교수는 "400년 전의 기록이 단순히 오래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개인 맞춤형 정밀 영양'의 토대가 되는 훌륭한 자산"이라며, "음식으로 건강을 다스리고자 했던 어의들의 '식치' 철학을 통해 한식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시간이었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강연을 마쳤다. 이날 콘서트에 참석한 청중들은 조선시대 어의들이 펼쳐낸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음식의 세계에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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