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푸드의 미래, '손맛'을 넘어 '데이터'를 자산으로
이경엽 기자
cooknchefnews@hnf.or.kr | 2025-11-05 19:02:26
[Cook&Chef = 이경엽 기자] 전 세계가 K-푸드의 맛에 열광하고 있다. 불닭볶음면 챌린지가 SNS를 휩쓸고, 냉동 김밥이 미국 마트에서 품절 사태를 빚는 지금, K-푸드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이 뜨거운 열기 속에서 우리는 '대장금의 역설'이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한다. 200년 전 베토벤이 작곡한 교향곡은 지금도 전 세계 오케스트라에 의해 거의 동일한 감동으로 재현되지만 ,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위대했던 '대장금'의 전설적인 요리들은 왜 지금 그대로 맛볼 수 없는가?
신간 『음식 레시피, 보호와 공유에 관한 이야기』(김성민·임병웅 공저)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날카롭고 체계적인 답변이다. K-푸드의 지속가능성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로 '레시피 표준화의 부재'를 지목하며, '손맛'이라는 모호한 신화에서 벗어나 '정밀한 데이터'로서 레시피를 재정의하고, 이를 '지적자산'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혁신적인 로드맵을 제시한다. 이 책은 한식 정책 전문가(김성민)와 지식재산권 법률 전문가(임병웅)라는, K-푸드의 미래에 가장 필요한 두 전문가의 협업이라는 점에서 그 무게감이 남다르다.
'손맛'이라는 신화의 해체: '대장금의 요리'는 왜 사라졌나?
책은 K-푸드의 근간을 이루는 '손맛'이라는 개념부터 해체하며 시작한다. 우리는 흔히 "조리는 예술"이라거나 "며느리도 모르는 비법"이라 말하지만, 저자들은 이것이 한식의 발전을 가로막는 '애매모호함의 전통'이 되었다고 비판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손맛'의 배경을 역사·문화적으로 깊이 파고든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궁중의 조리법이 금기에 속해 기록되지 못했던 점,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 글을 배우지 못해 구전(口傳)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한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체계적인 기록' 대신 '모호한 손맛'의 신화가 굳어졌다는 분석이다.
저자들은 '손맛'이 결코 신비의 영역이 아니며, 단지 문서화되지 않은 '과학'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책은 이를 입증하기 위해 '미디엄 레어 스테이크'를 굽는 원리를 상세히 설명한다. 미오신 단백질이 변성되는 섭씨 50도와 액틴이 변성되는 섭씨 65.5도 사이의 정확한 내부 온도를 맞추고, 섭씨 154도 이상에서 마이야르 반응(갈변)을 일으키는 것이 맛의 핵심이다. 조미료를 넣는 순서 역시 과학이다. 분자량이 큰 설탕이 작은 소금보다 먼저 들어가야 재료에 단맛이 제대로 스며든다. 즉, '손맛'이란 이러한 과학적 원리들을 경험적으로 체득한 결과일 뿐이며, 이를 정밀하게 기록하는 것이 '레시피 표준화'의 첫걸음이다.
'악보'로서의 레시피: 1g의 과학과 4차 산업혁명
저자들은 '정밀한 표기'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한다. 가령, '쌀 한 컵'이라는 표기는 "자포니카종, 추청, 9분도 도정, 경기 이천 쌀" 처럼, '고춧가루 적당량'은 "매쉬(mesh) 단위의 입자 크기와 스코빌 지수(SHU)로 표기한 매운맛" 처럼 기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맛의 통일'이라는 획일화(unification)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맥도날드가 햄버거 맛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 주방의 효율적인 시스템을 표준화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정밀하게 기록된 레시피는 베토벤의 악보처럼 셰프의 창의성을 시공간을 넘어 재현하게 하는 '설계도'가 된다.
이러한 표준화가 시급한 이유는 4차 산업혁명의 파고가 이미 외식산업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IBM의 AI '셰프 왓슨(Chef Watson)'은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새로운 레시피를 창조하고 , 로봇 키친 '몰리(Moley)'는 5,000가지가 넘는 요리를 재현한다. 이 기계들은 '적당량'이나 '노릇하게' 같은 추상적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정밀하게 계량된 데이터, 즉 '디지털 레시피'만을 요구한다. 한식이 이 미래 푸드테크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손맛'을 '데이터'로 변환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덮죽'과 '감자빵'의 딜레마: 왜 레시피는 법의 사각지대에 있나
그렇다면 이 '데이터'는 어떻게 법적인 자산으로 보호받을 수 있을까? 책의 2부와 3부는 이 핵심 질문에 대한 깊이 있는 법률적 탐구다. 저자들은 현재 법체계에서 레시피를 보호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로 '아이디어/표현 이분법(Idea/Expression Dichotomy)'을 꼽는다. 저작권법은 '아이디어'가 아닌 '표현'을 보호하는데, "닭고기를 튀겨 매콤한 소스에 버무린다"는 레시피 자체는 '아이디어'로 간주되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반면, 그 레시피를 설명한 요리책의 독창적인 문장이나 사진, 영상은 '표현'으로 보호받는다. 이것이 바로 '덮죽'이나 '감자빵' 같은 표절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저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현행법 안에서 레시피 창작물을 보호할 수 있는 다양한 법적 장치들을 꼼꼼하게 탐색한다. '며느리도 몰라' 식의 '영업비밀(Trade Secret)' 보호, '감자빵'의 독특한 모양이나 '소떡소떡'의 형태를 보호하는 '디자인권(Design Right)' , 그리고 '성심당 튀김 소보로'처럼 특정 출처를 나타내는 강력한 식별력을 획득할 경우 적용되는 '상표권(Trademark)' 및 '트레이드 드레스(Trade Dress)' 등이 그것이다. 나아가 이 책은 해외의 다양한 법적 시도들, 예컨대 레시피 자체를 저작권으로 보호하자는 견해나, 프랑스에서 시도된 것처럼 독자적인 특별법을 제정하자는 견해까지 소개하며 , K-푸드의 미래를 위한 법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K-푸드의 '다음 100년'을 위한 청사진: '레시피뱅크'라는 해법
이 책이 단순한 비평서를 넘어 구체적인 '청사진'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저자들이 제시하는 실질적인 해법 때문이다. 저자 김성민이 직접 설립한 '주식회사 블루레시피'와 특허받은 '레시피뱅크(Recipe Bank)' 시스템 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조리사 자격증 보유자나 교수 등 검증된 창작자가 앞서 정의한 '정밀 표기법'에 따라 레시피를 시스템에 등록하는 플랫폼이다. 이렇게 축적된 '디지털 레시피'는 AI가 학습할 수 있는 귀중한 '데이터'가 됨과 동시에, 창작자가 사용권(라이선스)을 통해 정당한 보상을 받고 거래할 수 있는 '상업적 자산'이 된다.
초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자 초대 한식재단 이사장이었던 정운천 의원의 추천사처럼, 이 책은 "한식산업이 미래 디지털 시대에도 대응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기록"의 중요성을 "놀랍고 훌륭하게" 집필한 역작이다. 또한 윤선희 한양대 명예교수의 말처럼, 이 책은 "레시피를 창작자의 열정과 노력이 담긴 소중한 지적 자산으로 승화시켜, 음식 산업의 미래를 밝히는 나침반"이 될 것이다.
『음식 레시피, 보호와 공유에 관한 이야기』는 '손맛'이라는 예술의 영역에 머물던 한식을 '데이터'와 '자산'이라는 산업의 영역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다. '대장금의 요리'를 잃어버린 과거를 반복하지 않고, K-푸드의 '다음 100년'을 준비하려는 모든 셰프, 외식 경영자, 정책 담당자, 그리고 미식가들에게 이 책은 가장 정확한 '레시피'를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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