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열의 '음식 잡설(雜說)']감자...흙 속에서 자란 나를 닮았다
신상열
| 2026-07-10 16:35:55
크기가 달라도 감자전, 감자조림 등 저마다 쓸모 있어
[Cook&Chef = 신상열 음식수필가] 지난 봄, 쌈채소보다 일찍 씨감자를 심었다. 씨감자를 심는 일은 씨앗을 뿌리는 일과 다르게 이미 생명을 품고 있는 시간을 흙에게 맡기는 일이다.
씨감자를 심기 위해서는 먼저 햇볕이 잘 들고 물 빠짐이 좋은 밭이 필요하다. 고랑을 만들고 적당한 간격으로 씨감자를 놓는다. 우리는 주말농장에 씨감자를 심었기에 밭은 이미 잘 준비되어 있었다. 싹이 위를 향하도록 조심스레 자리를 잡아주고 흙을 덮는다. 너무 깊지도, 너무 얕지도 않게.
그리고 기다린다.
물을 너무 많이 주어도 안 된다. 자연이 알아서 키워주는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보살핌이 필요하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지나가고 계절이 몇 번의 햇살을 보내는 동안 씨감자는 아무 말 없이 땅속에서 자신의 시간을 살아낸다.
하지가 지나고, 드디어 감자를 캐는 날이 왔다.
호미 끝으로 흙을 조심조심 헤치는데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친구들과 흙을 파고 모래놀이를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손으로 흙을 모아 산을 만들고 길을 내며 놀던 시간이었다. 그때의 흙은 더럽다는 생각보다 따뜻하다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손톱 밑에 흙이 까맣게 들어가도 마냥 즐거웠고, 해가 질 때까지 흙과 어울려 놀다가 엄마의 부름에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오늘 내 손끝에 닿는 흙도 그때의 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월은 흘렀지만 흙은 여전히 같은 온도로 사람을 품고 있다.
조심스레 흙을 걷어내자 감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 시간 어둠 속에서 묵묵히 자라던 감자가 처음 햇빛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감자들은 저마다 얼굴이 달랐다. 주먹만 한 녀석도 있었고, 손가락 끝만 한 녀석도 있었다. 같은 흙에서, 같은 햇살을 받고 자랐지만 모두가 다른 모습이었다.
사람도 그렇다.
같은 시간을 살아도 누구는 조금 더디게 자라고, 누구는 조금 빨리 자란다. 크기가 다르다고 가치가 다른 것은 아니다. 작은 감자도 조림이 되어 식탁을 풍성하게 하고, 큰 감자는 채를 썰어 노릇한 감자전이 된다. 저마다의 쓰임이 있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감자는 빛보다 어둠 속에서 더 많은 시간을 살아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비를 견디고, 흙의 무게를 이겨내며 자신을 키운다. 우리도 그렇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들이 결국 한 사람을 자라게 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기다림과 묵묵함이 결국 삶의 열매를 만든다.
감자를 하나씩 바구니에 담으며 자연스레 식탁이 떠올랐다. 갓 쪄낸 햇감자의 구수한 향, 버터를 살짝 녹여 먹는 포슬포슬한 감자, 짭조름하게 졸인 감자조림, 노릇하게 부친 감자전, 된장찌개 속에서 포근하게 익어갈 감자.
그리고 그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을 짝꿍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작은 감자는 조림을 하고, 큰 감자는 채를 썰어 감자전을 부쳐야지. 아직 요리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마음이 불러왔다. 함께 먹을 사람을 떠올리는 일만으로도 음식은 절반쯤 완성되었다.
흙에서 막 나온 감자는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었다. 긴 기다림이 만든 결실이었고, 계절이 써 내려간 편지였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어 먹기 위해 흙이 내어준 선물이다.
우리는 흔히 수확의 기쁨만 이야기하지만, 감자는 심는 순간부터 이미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좋은 땅을 고르는 일, 적당한 거리를 두는 일,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는 일, 그리고 묵묵히 기다리는 일.
흙은 언제나 말이 없지만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감자를 캐면서 내 안에 오래 묻혀 있던 어린 시절도 함께 캐냈다. 흙장난하며 웃던 아이의 마음, 누군가와 음식을 나누는 기쁨, 기다림 끝에 얻게 되는 감사까지.
감자는 흙속에서 자랐고, 나의 마음은 그 흙을 헤치며 다시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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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열(음식수필가) = 식탁 위에서 펼쳐지는 사소한 순간까지 가슴에 담아 음식과 사람,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잇는 글을 쓰며 먹거리의 인문화적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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