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위기·디지털 전환 속 농식품 공급망, 혁신으로 식량 안보 돌파구 찾는다
오요리 기자
cnc02@hnf.or.kr | 2026-02-06 23:58:19
[Cook&Chef = 오요리 기자] 한국 농식품 공급망이 기후 위기와 디지털 전환이라는 두 가지 거대 변수 앞에서 구조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상기후는 생산량 예측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농촌 고령화는 생산 기반의 존립 자체를 위협한다. 반면 소비 채널은 오프라인 도매시장에서 온라인으로 빠르게 이동하며 전통적 유통 질서를 재편하고 있다.
생산과 소비의 극심한 불균형은 공급망 불안정성을 심화시켜 식량 안보를 위협하는 국가적 과제로 부상했다. 이러한 위기 인식은 정부와 민간의 협력으로 이어졌다. 최근 기획재정부, 농림축산식품부, 해양수산부가 이마트, CJ프레시웨이 등 민간 유통 기업과 ‘농수산물 유통구조 혁신’을 논의한 것은 중요한 전환점이다.
이는 단기적인 물가 안정 대책만으로는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음을 시사한다. 본 기사는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공급망 진단 데이터를 기반으로 현 위기의 실체를 분석한다. 나아가 정부와 민간이 추진하는 유통 혁신이 외식 산업과 소비자에게 미칠 영향을 심층 조망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 한정훈 유통혁신연구실장은 ‘2026 농업전망’ 보고서에서 국내 농식품 공급망(Agri-food Supply Chain)의 현주소를 진단했다. 농식품 공급망은 생산부터 가공, 유통, 판매, 소비에 이르는 전 과정을 포괄하는 가치사슬이다. 제조업과 달리 생산 주기가 길고 기상 변동성이 크며, 신선도 유지가 어려워 관리가 복잡하다.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농식품 공급망은 SCOR(Supply Chain Operations Reference) 모델 기반 진단 결과 종합 6.397점을 기록했다. 이는 ‘기본 수준은 유지되나 안정성 확보를 위해 지속적 관리가 필요한 상태’를 의미한다. 외부 충격에 대한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취약하다는 분석이다.
세부 지표는 위기의 원인을 더욱 명확히 보여준다. 식품제조업 인력(9.9점)과 농업 기술(9.6점) 등 소프트웨어 측면은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구조적 문제는 심각했다. 특히 농식품 수입국 다변화(0.7점)와 농산물 저장 및 비축(2.2점) 항목은 매우 낮은 수준으로, 공급망의 가장 취약한 고리로 지목됐다. 낮은 저장 단가와 민간 주도 조달 구조가 외부 충격 발생 시 가격 급등으로 이어지는 구조적 취약점을 형성하고 있다.
공급망의 첫 단계인 생산 현장은 기후 변화와 인구 구조 변화의 이중고에 직면했다. 2024년 폭염일수는 30.1일로, 지난 20년 평균(13.3일)의 두 배를 초과했다. 이는 생산량 급감과 품질 저하로 직결된다. 외식업 현장에서 특정 채소 가격이 급등하는 현상이 반복되는 이유다.
생산 주체의 붕괴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다. 2023년 농가 가구 수는 사상 처음으로 100만 가구 미만으로 감소했다. 이 중 65세 이상 고령농 비중은 55.8%에 달해, 농촌 생산 인력의 절반 이상이 은퇴를 앞둔 세대임을 보여준다. 매년 상승하는 생산비와 농지 전용 문제까지 겹치면서 생산 기반 축소는 가속화되고 있다.
생산 기반의 약화는 식자재를 사용하는 외식업계의 원가 부담으로 전가된다. 안정적인 물량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메뉴 가격을 인상하거나, 품질이 낮은 대체재를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는 최종적으로 소비자 부담 증가와 외식 경험의 질적 하락으로 이어진다.
생산 현장이 위축되는 동안 유통 시장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전통 농수산물 유통의 중심이었던 도매시장의 영향력은 현저히 감소했다. 전국 농수산물 도매시장 거래 물량은 10년 전과 비교해 크게 줄었으며, 청과물의 도매시장 경유 비중은 50.5%까지 하락했다. 복잡한 유통 단계를 거치는 구조가 비용과 시간 측면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것이다.
그 빈자리는 온라인 시장이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2024년 온라인 농식품 거래액은 47조 4000억 원을 기록, 2017년 대비 약 4.5배 성장했다. 전체 소비자의 9.7%가 온라인을 제1의 식료품 구매처로 인식할 만큼, 온라인 유통은 주류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변화는 스마트팜, 스마트 APC(농산물산지유통센터), AI 기반 재고 관리 등 디지털 기술 확산의 결과다.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은 정부와 민간이 유통 구조 혁신을 추진하는 직접적 배경이 된다. 낡은 오프라인 중심 유통 시스템으로는 기후 위기로 인한 생산 불확실성과 온라인 중심의 소비 트렌드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지난 2월 5일 서울 양재 aT센터에서 열린 ‘농수산물 유통구조 혁신을 위한 현장 간담회’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반영한다. 기획재정부, 농림축산식품부, 해양수산부 등 정부 부처와 이마트, GS리테일, 오아시스, CJ프레시웨이, 아워홈 등 민간 기업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소매, 온라인, 식자재 유통을 대표한다.
논의의 핵심은 복잡한 유통 단계를 축소하고,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산지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새로운 경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이를 위해 2027년 예산 편성에 관련 사업을 적극 반영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는 단기적인 할인 지원을 넘어 구조적 문제 해결에 나서겠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정부와 민간이 제시한 혁신 방안의 중심에는 ‘온라인 도매시장’ 활성화가 있다. 정부는 2030년까지 전체 도매유통 물량의 50%를 온라인 도매시장에서 처리한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이는 2025년 목표치인 6%와 비교하면 매우 높은 수준이다.
이를 뒷받침할 구체적인 실행 계획도 제시됐다. 2026년에만 59개소의 스마트 산지유통센터(APC)와 수산물산지유통센터(FPC) 구축을 지원한다. 또한 온라인 도매시장 전용 융자 1000억 원, 신규 바우처 사업 186억 원 등을 투입한다. APC와 FPC는 규격화, 저온 관리, 포장 등 상품화 기능을 수행하며 산지 품질 관리의 핵심 인프라 역할을 한다.
유통 구조 혁신이 성공적으로 안착할 경우 외식업계와 소비자는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가장 큰 기대효과는 ‘가격 안정성’과 ‘품질 향상’이다. 외식업체는 온라인 도매시장을 통해 유통 단계를 줄인 신선한 식자재를 합리적인 가격에 직접 구매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원가 절감과 재고 관리 효율성 증대에 기여한다.
특히 CJ프레시웨이나 아워홈 같은 대형 식자재 유통업체는 정부의 APC/FPC 인프라를 활용해 산지 직배송 시스템을 고도화할 수 있다. 이는 이들로부터 식자재를 공급받는 다수 중소 외식업체의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소비자 역시 산지에서 식탁까지 유통 경로가 단축되면서 높아진 신선도와 낮아진 가격을 체감할 수 있다.
정부와 민간 데이터를 연계한 수급 예측 고도화는 특정 품목의 가격 급등을 사전에 방지하는 효과도 기대된다. 다만, 과도기적 어려움도 예상된다. 온라인 플랫폼 활용이 미숙한 영세 자영업자나 전통시장 기반 식당들은 새로운 유통 시스템 적응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들의 디지털 격차 해소를 위한 정부의 교육과 지원책 병행이 요구되는 이유다.
정부와 민간의 협력을 통한 유통 혁신은 올바른 방향이다. 그러나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첫째, 생산 현장의 디지털 역량 강화가 시급하다. 고령 농어업인이 온라인 도매시장에 직접 상품을 출하하고 제값을 받기 위한 맞춤형 교육과 기술 지원이 필수적이다.
둘째, 데이터 연계와 활용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 정부와 민간이 보유한 생산, 재고, 판매 데이터를 효과적으로 결합하고 분석할 통합 플랫폼 구축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민간 기업의 영업 정보 보호와 공공 데이터 개방 범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KREI가 제안한 가칭 ‘한국 농식품 공급망 지수(KASCI)’ 도입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공급망 상태를 객관적 지표로 상시 진단하고, 문제 발생 시 신속히 대응하는 체계 마련에 기여할 수 있다. 기후 위기, 인구 절벽, 디지털 전환 속에서 농식품 유통 구조 혁신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이번 민관 협력은 그 첫걸음이며, 지속 가능한 공급망 생태계 구축이라는 장기적 안목으로 정책을 추진해야 할 때다.
Cook&Chef / 오요리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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