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영의 한식탐구] 멸치와 함께 이어져 온 한국의 맛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 2026-05-26 18:40:30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5~6월이 되면 남해안 일부 지역의 밥상에는 생멸치가 오른다. 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 연안으로 몰려든 멸치는 회와 무침, 쌈밥, 찌개로 변주된다. 부산 기장과 경남 남해, 통영, 거제 일대에서는 이 시기를 기다려 생멸치 음식을 찾는 이들도 적지 않다. 평소 멸치는 마른 반찬이나 국물용 재료로 더 익숙하지만, 산지에서 만나는 생멸치는 전혀 다른 계절감을 지닌 식재료다.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멸치는 작지만 선명한 맛을 품고 있고, 그 맛은 한식의 오래된 감칠맛으로 이어진다.
멸치는 화려한 식재료와는 거리가 있다. 상 위의 중심에 놓이기보다 국물의 바탕이 되고, 김치의 간을 잡으며, 볶음 반찬으로 밥 한 끼를 받쳐 왔다. 그러나 한국 음식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멸치의 존재감은 결코 작지 않다. 한식의 많은 음식은 국물과 장, 젓갈, 저장 음식의 문화 위에서 만들어져 왔다. 멸치는 그 가운데서 말리고, 삭히고, 끓여내는 방식으로 오랫동안 한국인의 밥상 가까이에 머물러 온 생선이다.
기록 속의 멸치, 조심스럽게 읽어야 할 이름
멸치에 대한 기록은 조선 후기 어보류에서 비교적 또렷하게 나타난다. 담정 김려의 『우해이어보』, 정약전의 『자산어보』, 서유구의 『난호어목지』 등에는 멸치의 명칭과 생태, 어획 방식에 관한 내용이 보인다. 이 문헌들은 멸치가 단순히 바닷가에서 잡히는 작은 생선에 그치지 않고, 조선 후기 연안 어업과 생활 식문화 속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남해안 일대에서 멸치를 대량으로 잡아 말리거나 젓갈로 담가 이용한 흔적도 멸치가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 안으로 깊이 들어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다만 조선 전기 기록을 볼 때는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토산 항목에는 오늘날의 멸치와 관련해 해석되는 어명 기록이 일부 등장한다. 그 가운데 ‘행어’를 멸치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를 곧바로 현재의 멸치와 같은 어종으로 확정하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남는다. 옛 문헌의 물고기 이름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달리 쓰였고, 같은 이름이 서로 다른 어종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멸치의 역사를 말할 때 조선 전기 지리지 기록은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료로 읽되, 멸치가 문헌 속에서 보다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는 조선 후기 어보류로 보는 편이 안정적이다. 이처럼 기록을 조심스럽게 읽는 과정은 멸치의 역사를 축소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오래된 식재료를 오늘의 이름으로 성급하게 끌어오지 않고, 당시의 언어와 지역적 맥락 속에서 다시 살피는 작업에 가깝다.
말리고 삭히며 이어진 저장의 지혜
냉장 기술이 없던 시대에 멸치는 중요한 저장 식재료였다. 생선은 쉽게 상하기 때문에 오래 두고 먹으려면 말리거나 소금에 절이는 과정이 필요했다. 멸치는 크기가 작아 건조가 비교적 쉬웠고, 대량으로 잡히면 빠르게 말려 보관할 수 있었다. 말린 멸치는 바닷가를 넘어 내륙으로도 유통됐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건멸치를 통해 해산물의 맛과 영양을 접할 수 있었던 셈이다. 육류 소비가 지금처럼 자유롭지 않았던 시기, 멸치는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단백질 공급원이기도 했다.
멸치가 젓갈로 이용된 배경 역시 저장 식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남해안과 서해안은 어업과 염업이 함께 발달한 지역이었다. 바다에서는 작은 생선이 많이 잡혔고, 해안가에서는 소금이 생산됐다. 이 두 조건이 만나면서 젓갈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멸치는 크기가 작고 살이 연해 소금에 절이면 비교적 빠르게 발효가 진행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선의 단백질은 분해되고, 짠맛 속에 깊은 감칠맛이 생겨난다. 이렇게 만들어진 멸치젓은 단순한 저장 음식에 머물지 않았다. 음식의 간을 맞추고 맛의 깊이를 더하는 조미 재료로 쓰였다.
조선시대 공물과 진상 체계 안에서도 해산물과 젓갈류는 중요한 식료품이었다. 각 지방의 산물은 중앙으로 올라갔고, 저장성이 높은 수산 가공품은 이동과 보관에 유리했다. 다만 특정 지역의 건멸치나 멸치젓이 어느 시기, 어떤 이름의 물목으로 궁중에 올랐는지는 별도의 사료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기사에서 멸치를 진상품으로 단정하기보다는, 조선 후기 문헌과 생활 속에서 건조·염장·젓갈 형태로 활용된 흔적이 뚜렷하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 더 정확하다. 멸치의 의미는 궁중의 특별한 식재료였다는 데 있기보다, 오히려 일상의 조미와 저장 문화 안에서 넓게 쓰였다는 데 있다.
부엌의 조연에서 감칠맛의 설계자로
조리서와 생활 기록 속에서도 젓갈과 건어물을 활용한 음식문화의 흐름은 이어진다. 『규합총서』에는 젓국을 활용한 침채류와 저장 음식의 기록이 보이고, 『시의전서』에서도 국물과 찬 조리에 젓국과 건어물을 이용한 내용이 나타난다. 오늘날처럼 ‘멸치 육수’라는 표현이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작은 생선을 말리거나 젓갈 형태로 이용해 음식의 간과 감칠맛을 더하는 방식은 조선 후기 음식문화 속에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의 김치에 액젓을 넣고, 된장국이나 칼국수 국물에 건멸치를 넣어 맛을 내는 방식도 이런 흐름 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멸치의 힘은 강한 향이나 화려한 식감에 있지 않다. 멸치는 음식의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맛을 받친다. 멸치와 다시마를 함께 끓여낸 국물은 된장국, 김치찌개, 칼국수, 떡국, 잔치국수 같은 음식의 바탕이 된다. 멸치젓과 멸치액젓은 김치와 장아찌, 무침 양념의 간을 잡는다. 멸치볶음은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밑반찬으로 밥상에 오른다.
이렇게 보면 멸치는 한국 음식의 여러 층위를 관통하는 재료다. 생선이면서 조미료이고, 반찬이면서 국물의 재료이며, 저장 음식이면서 발효 음식이기도 하다. 한식에서 감칠맛은 특정한 조미료 하나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장과 젓갈, 건어물, 채소, 해조류가 쌓이면서 만들어지는 복합적인 맛에 가깝다. 멸치는 그 가운데서 가장 익숙하면서도 오래된 맛의 바탕을 이루어 왔다.
남해안의 계절 음식에서 전국의 국물 재료로
현재 한국 멸치 어업의 중심은 남해안이다. 통영과 남해, 거제, 기장, 여수 등은 대표적인 멸치 산지로 알려져
있다. 난류가 흐르고 플랑크톤이 풍부한 연안 환경은 멸치 어장 형성에 유리하다. 산지에서는 계절에 따라 생멸치 음식이 등장하고, 건멸치는 크기와 품질에 따라 나뉘어 전국으로 유통된다. 봄과 초여름의 생멸치가 산지의 계절감을 보여준다면, 말린 멸치는 계절을 넘어 한국인의 일상 식탁에 꾸준히 놓이는 재료라 할 수 있다.
지역에 따라 멸치를 먹는 방식도 다르게 발전했다. 남해안 지역에서는 생멸치를 채소와 함께 싸 먹는 멸치쌈밥 문화가 발달했다. 생멸치를 된장과 고추, 채소와 함께 끓여내는 찌개는 산지 음식의 투박하면서도 진한 맛을 보여준다. 기장 일대에서는 생멸치회와 무침이 계절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멸치젓은 김치와 각종 양념의 간을 잡는 데 쓰였고, 건멸치는 전국의 국물 음식에 스며들었다. 작은 생선 하나가 지역의 계절 음식과 전국의 일상 음식으로 동시에 확장된 셈이다.
멸치는 크기에 따라서도 쓰임이 나뉜다. 유통 현장에서는 세멸, 자멸, 소멸, 중멸, 대멸 등 크기에 따라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작은 멸치는 볶음 반찬이나 주먹밥, 무침에 쓰인다. 중간 크기의 멸치는 조림이나 볶음에 활용되고, 큰 멸치는 주로 국물용으로 사용된다. 생멸치는 회와 무침, 찌개, 쌈밥에 어울린다. 같은 멸치라도 크기와 가공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음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를 조금 더 실용적으로 정리하면 생멸치는 멸치회와 멸치쌈밥, 생멸치찌개처럼 산지의 제철 음식으로 소비된다. 대멸은 된장국과 잔치국수, 칼국수, 떡국 등 국물 음식의 바탕을 내는 데 주로 쓰인다. 중멸과 소멸은 조림과 볶음에 많이 쓰이고, 세멸이나 지리멸치로 불리는 작은 멸치는 아이들 반찬, 주먹밥, 비빔 음식의 고명으로도 활용된다. 멸치가 단일한 식재료가 아니라, 조리법과 지역성에 따라 여러 역할을 맡아 온 재료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작지만 밀도 높은 영양, 다시 읽히는 가치
영양학적으로도 멸치는 가치가 높다. 멸치는 단백질과 칼슘이 풍부하고, 뼈째 먹을 수 있는 생선이라는 점에서 칼슘 섭취에 유리하다. 오메가3 지방산과 DHA, 비타민D 등도 함유하고 있어 성장기 어린이와 노년층의 식재료로 자주 언급된다. 작은 생선이지만 영양 밀도가 높고, 건조 상태로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그래서 멸치는 특별한 날의 귀한 음식이라기보다, 매일의 밥상을 지탱하는 실용적인 식재료로 자리 잡아 왔다.
최근에는 멸치의 가치가 지속가능성의 관점에서도 다시 읽히고 있다. 대형 어종 중심의 소비가 자원 고갈과 환경 부담 문제로 이어지면서, 비교적 자원 효율성이 높은 소형 어종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멸치는 먹이사슬의 하위에 있는 작은 어종으로, 적절한 관리가 전제될 때 효율적인 단백질 자원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물론 모든 어업 자원이 그렇듯 남획을 피하고 산란기와 어장 환경을 관리하는 일은 중요하다. 지속가능한 식재료라는 의미는 무조건 많이 소비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자원의 순환과 어업 관리 속에서 그 가치를 살펴야 한다는 뜻에 가깝다.
현대 미식의 흐름에서도 멸치는 다시 주목할 만한 재료다. 최근 음식 문화는 강한 양념이나 과장된 맛보다 재료 본연의 맛, 자연스러운 감칠맛, 지역성과 계절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멸치는 이런 흐름과 잘 어울린다. 멸치 한 줌을 물에 넣고 끓이면 국물의 결이 달라지고, 잘 삭힌 멸치젓 한 숟가락은 김치와 양념의 맛을 깊게 만든다. 복잡한 기술 없이도 깊은 맛을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멸치는 가장 한국적인 감칠맛의 원형에 가까운 재료라 할 만하다.
거창한 기록보다 오래된 생활의 맛
멸치의 역사는 거창한 기록보다 생활 속 사용의 역사에 가깝다. 왕실 연회에서 주인공으로 빛난 재료라기보다, 바닷가에서 잡혀 말려지고, 장독 속에서 삭고, 부엌에서 국물로 우러나며 한국인의 입맛을 만들어 온 재료다. 문헌 속 멸치의 이름을 하나하나 확정하는 일은 조심스러워야 하지만, 조선 후기 어보류와 조리 기록,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조리 관행은 멸치가 한국 식문화의 깊은 층에 놓여 있었음을 말해준다.
작은 생선 하나가 국물과 젓갈, 반찬과 계절 음식으로 이어져 왔다. 멸치는 말려서 오래 두고 먹는 저장의 지혜였고, 소금에 삭혀 맛을 내는 발효의 재료였으며, 끓여서 음식의 바탕을 만드는 국물의 시작이었다. 지금도 한국의 부엌에서 멸치는 가장 익숙한 재료 중 하나다. 눈에 띄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한식의 깊은 맛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탱해 온 생선. 멸치가 한국 음식의 기본 맛으로 남아 있는 이유다.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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