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의 변천사: '이중과세'의 아픔을 넘어 '헬시 플레저'의 시대로
이경엽 기자
cooknchefnews@hnf.or.kr | 2026-02-17 09:00:40
이미지 생성: ChatGPT (OpenAI) 제공 / Cook&Chef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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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계절, 민족 최대의 명절 설날이 다가왔다. 설은 단순히 달력의 첫 장을 넘기는 행위를 넘어, 묵은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제의적 성격을 띤다. 하지만 2026년 오늘날 우리가 맞이하는 설날의 풍경은 과거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한쪽에서는 정성스레 차례상을 차리고 조상께 예를 올리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스마트폰으로 떡국 한 그릇의 칼로리를 검색하며 '제로 슈거' 식혜를 찾는다. 본지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역사적 기록과 김정숙 전남과학대학 명예교수의 저서 『열두 달 세시풍속과 절기음식』, 그리고 최근 식품업계의 트렌드를 종합하여 설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망해 본다. |
역사의 격랑 속에서 지켜낸 이름, '설날'
[Cook&Chef = 이경엽 기자] 우리가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설날'이라는 이름과 날짜는 사실 굴곡진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근대 국가로 접어들며 음력설과 양력설이라는 두 개의 설이 공존하는 이른바 '이중과세(二重過歲)'의 시기가 있었다. 1896년 태양력이 수용된 이후에도 민간에서는 끈질기게 음력설을 고수했으나, 일제강점기는 우리 고유의 명절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당시 일제는 조선의 전통문화를 말살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우리 설날을 억압했다. 명절 무렵이면 떡방앗간을 강제로 폐쇄하거나, 설빔을 입고 나온 어린이들에게 먹칠을 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대신 일본의 명절인 천장절이나 명치절을 강요하며, 일본식 설 풍습인 '시메나와(금줄)'를 대문에 걸게 했다. 광복 이후에도 정부는 '이중과세 방지'와 '산업 역군'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신정(양력 1월 1일)을 권장하고 구정(음력설)을 홀대했다. 김정숙 명예교수가 저서에서 "국민들은 근 백 년이 지나도록 음력 설날을 그대로 쇠었다"고 회고한 것처럼, 설날은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아 1989년에야 비로소 '설날'이라는 본명을 되찾고 3일 연휴의 지위를 회복했다.
'설'이라는 단어의 유래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설'이 새해 첫 달의 첫날이라 아직 낯설기 때문에 '설다', '낯설다'에서 유래했다는 견해와, 나이를 헤아리는 단위인 '살'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을 소개한다. 또한 김정숙 교수는 이를 인문학적으로 확장하여 "새해 첫날은 노트의 첫 페이지와 같다"고 정의한다. 어제까지의 나를 덮어두고 하얀 여백의 시간을 여는 것, 그것이 바로 설날이 갖는 갱생(更生)의 의미라는 것이다. 삼가고 조심한다는 뜻의 '신일(愼日)'이라 불렸던 설날은, 과거의 아픔을 딛고 희망을 설계하는 날로서 우리 곁에 머물러 왔다.
풍요의 상징에서 '관리'의 대상으로: 식탁의 변화
과거 농경사회에서 설날은 곧 '먹는 날'이었다. 김정숙 교수의 설명처럼, 농한기인 정월은 추수한 곡식이 남아 있고 가축이 살찌는 시기였다. 곧 닥쳐올 농번기의 고된 노동을 대비해 "실컷 먹고 충분히 놀아둬야 하는" 시기였던 셈이다. 따라서 설 음식인 세찬(歲饌)은 기름지고 풍성한 것이 미덕이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미덕은 도전을 받고 있다. 지난 2024년부터 설날 식탁 풍경은 '맛, 양, 가격' 중심에서 '영양 밸런스와 칼로리' 중심으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던 떡국은 이제 '칼로리 폭탄'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한다. 떡국 한 그릇의 열량은 약 588kcal이며 만두를 추가하면 778kcal까지 치솟기 때문이다. 이는 밥 두 공기에 육박하는 수치로, 혈당 관리에 민감한 현대인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개인의 기호 변화를 넘어 식품 산업 전반의 지형도를 바꾸고 있다. 이른바 '헬시 플레저(Healthy Pleasure)' 트렌드다. 즐겁게 건강을 관리하려는 소비자들의 욕구는 명절 음식의 성역마저 허물었다. 풀무원이 당과 나트륨을 줄인 '지구식단' 라인업을 강화하고, 오뚜기가 곤약 등 저칼로리 원료를 내세운 '가뿐한끼' 브랜드를 전개하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대한 응답이다.
전통의 '해체'가 아닌 '재해석'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변화가 전통의 단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전통의 소멸이 아닌 재해석과 진화"라고 진단한다. 과거에는 하얀 쌀밥과 고깃국이 귀했기에 그것을 배불리 먹는 것이 최고의 복(福)이었다면, 영양 과잉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는 내 몸을 돌보고 건강을 지키는 것이 새로운 형태의 복을 비는 행위가 된 것이다.
전통적인 떡국이 소고기 양지와 흰 가래떡으로 맛을 냈다면, 현대의 떡국은 닭가슴살 육수와 현미떡, 혹은 곤약떡으로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새해를 맞아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건강을 기원한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김정숙 교수가 언급한 "육신은 서서히 삭아가지만 우리 앞의 시간은 축복이며 가능성"이라는 설날의 철학적 의미는, 현대의 '건강한 식탁' 위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결론: 백 년의 시간을 관통하는 '잘 됨'의 기원
일제강점기의 탄압 속에서도 꿋꿋이 음력설을 지켜낸 선조들의 마음과, 당류와 칼로리를 꼼꼼히 따지며 건강한 식재료를 고르는 현대인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같다. 그것은 나와 내 가족이, 그리고 우리 공동체가 새로운 시간 속에서 무탈하고 건강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기록한 설의 역사적 변천사가 보여주듯, 설날은 고정된 화석이 아니라 시대와 호흡하며 끊임없이 변화해 온 유기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인사가 단순히 덕담을 넘어, 구체적인 건강 관리와 실천으로 이어지는 21세기의 설날. 우리는 지금 숫자로 표기된 영양성분표 뒤에 숨겨진, 시대를 관통하는 따뜻한 기원을 확인하고 있다.
Cook&Chef / 이경엽 기자 cooknchefnews@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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