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ok&Chef = 정수연 전문기자] 넓은 팬 위에 쌀이 얇게 펼쳐진다. 고기와 채소에서 우러난 육수는 밥알 사이로 배어들고, 사프란의 노란빛은 팬 전체를 천천히 물들인다. 어떤 팬에는 닭고기와 토끼고기, 콩과 채소가 올라가고, 어떤 팬에는 새우와 홍합, 오징어가 놓인다. 완성된 빠에야는 접시에 담기기 전부터 이미 하나의 식탁처럼 보인다. 팬을 가운데 두고 사람들이 둘러앉는 순간, 빠에야는 한 사람의 끼니가 아니라 발렌시아의 땅과 물, 스페인의 식탁 문화를 함께 담은 음식이 된다.
빠에야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출발점은 스페인 전체가 아니라 동부 지중해 연안의 발렌시아 지방이다. 발렌시아는 바다와 농경지가 맞닿아 있고, 물길과 습지를 바탕으로 쌀 재배가 발달한 지역이다. 이베리아반도에 오래 남아 있던 무어인의 관개 기술과 쌀 문화는 이곳의 환경과 만나 발렌시아식 쌀 요리의 토대가 되었다.
스페인 음식이라고 하면 밀로 만든 빵, 올리브유, 하몽, 와인 같은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기 쉽다. 그런 나라의 대표 음식 가운데 하나가 쌀 요리라는 사실은 빠에야를 더 흥미롭게 만든다. 이 음식은 스페인이 한 가지 문화만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아니라, 로마와 이슬람, 지중해와 농경지가 오랜 시간 겹쳐진 땅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빠에야를 따라가다 보면 스페인의 식탁 위에 왜 쌀이 놓였는지, 왜 발렌시아에서 이 음식이 태어났는지, 왜 큰 팬 하나가 사람들을 모으는 식탁이 되었는지를 함께 보게 된다.
무어인의 물길이 남긴 쌀의 식탁
빠에야의 유래를 따라가면 먼저 쌀이 보인다. 발렌시아의 쌀 문화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중세 이베리아반도는 오랜 시간 이슬람 세력의 영향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쌀과 향신료, 물길을 다루는 기술이 들어왔다. 무어인들은 지중해 연안의 오래된 관개 체계를 다듬었고, 물을 끌어와 작물을 기르는 방식을 발달시켰다. 발렌시아의 쌀 문화는 그 역사 위에서 자랐다.
발렌시아에 빠에야가 자리 잡은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 지역에는 쌀이 자랄 수 있는 물과 땅이 있었고, 그 쌀을 한 끼로 만들어 먹는 농촌의 생활이 있었다. 발렌시아의 들판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넓은 팬에 모았다. 닭고기와 토끼고기, 콩과 제철 채소, 때로는 식용 달팽이가 쌀과 함께 익었다. 오늘날 세계인이 떠올리는 화려한 해산물 빠에야보다, 원형에 놓인 빠에야는 발렌시아의 논과 들판에서 나온 음식이었다.
그래서 빠에야는 처음부터 귀한 재료를 과시하는 음식이라기보다, 그 지역의 땅과 물이 허락한 재료를 한데 모아 완성한 음식이었다. 쌀은 배를 채웠고, 고기와 콩은 힘을 더했으며, 채소와 향신료는 팬 안의 맛을 넓혔다. 한 지역의 농업 환경과 생활 방식이 쌀 요리의 형태로 옮겨진 셈이다.
팬에서 이름을 얻은 이유
빠에야라는 이름은 재료가 아니라 조리 도구에서 왔다. 발렌시아어와 카탈루냐어 계열에서 ‘paella’는 원래 팬을 뜻하는 말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프랑스어와 라틴어에서 팬이나 접시를 뜻하는 말과 이어진다. 다시 말해 빠에야라는 이름은 이 음식이 무엇을 넣었는가보다, 어떤 팬에서 어떻게 익어가는가에 더 깊이 기대고 있음을 보여준다.
빠에야 팬은 넓고 얕다. 쌀이 두껍게 쌓이지 않고 넓게 퍼져야 육수가 고르게 배고, 수분이 날아가며 밥알의 형태가 살아난다. 팬이 깊은 냄비였다면 빠에야는 지금과 다른 음식이 되었을 것이다. 넓은 팬은 쌀을 질척하게 만들지 않고, 재료의 맛을 밥알에 입힌다. 마지막에는 바닥에 얇게 눌은 쌀층이 생긴다. 이를 스페인어로 소카랏이라고 부른다.
소카랏은 빠에야를 먹는 즐거움 중 하나다. 팬 바닥에 붙은 쌀을 긁어 먹는 감각은 한국의 누룽지나 돌솥밥에 남은 눌은 밥을 떠올리게 한다. 쌀을 익히고, 바닥에 남은 맛까지 아끼는 정서는 한국 독자에게도 이해하기 쉽다. 빠에야가 멀리 있는 스페인 음식이면서도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쌀을 중심에 두고, 눌은 맛까지 즐기는 식탁의 감각이 서로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사프란의 노란빛도 이 음식의 인상을 만든다. 크로커스 꽃의 암술대를 말린 사프란은 아주 적은 양으로도 쌀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값비싼 향신료였기 때문에 늘 넉넉하게 쓰였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빠에야의 노란색은 스페인 음식 안에 남은 지중해와 이슬람 문화의 자취를 떠올리게 한다. 쌀과 사프란, 팬과 불이 만날 때 빠에야는 발렌시아의 쌀 요리에서 스페인을 읽는 음식으로 넓어진다.
큰 팬을 둘러싼 사람들
빠에야가 오래 이어진 이유는 맛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 음식은 만드는 방식부터 함께 먹는 장면까지 사람들을 모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커다란 팬 하나에 쌀과 재료를 담아 익히고, 완성된 팬을 식탁 한가운데 둔다. 접시마다 따로 완성되는 음식이 아니라, 하나의 팬에서 여러 사람의 몫이 나오는 음식이다.
발렌시아에서는 축제나 마을 행사, 주말 가족 식사에 빠에야가 자주 등장했다. 야외에서 불을 피우고, 팬을 올리고, 쌀이 익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식사 전부터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은다. 큰 팬을 다루고 불을 조절하는 과정은 손이 많이 가지만, 바로 그 과정 때문에 빠에야는 특별한 날의 음식이 되었다. 빠에야가 발렌시아의 휴일과 가족, 마을 행사에 오래 남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음식은 개인의 접시보다 공동의 팬에 더 잘 어울린다. 팬 가장자리와 가운데, 바닥의 소카랏까지 사람들은 각자의 몫을 나누어 먹는다. 빠에야를 먹는 풍경에는 식탁에 오래 머물며 가족과 이웃의 시간을 나누는 생활 정서가 배어 있다. 식사는 배를 채우는 시간이면서, 사람들과 함께 머무는 시간이기도 하다. 빠에야는 그 정서를 가장 넓은 팬 위에 펼쳐 보이는 음식이다.
들판의 음식에서 지중해의 얼굴로
오늘날 세계인이 빠에야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그리는 장면은 해산물 빠에야일 가능성이 크다. 새우와 홍합, 오징어, 바닷가재가 노란 쌀 위에 올라간 모습은 지중해의 색을 한눈에 보여준다. 특히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관광지에서 해산물 빠에야는 스페인의 대표 이미지처럼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 화려한 장면만으로 빠에야를 이해하면, 이 음식의 뿌리가 흐려진다. 발렌시아식 빠에야는 원래 들판의 음식이었다. 닭고기와 토끼고기, 콩과 채소가 중심이 된 발렌시아의 빠에야는 쌀이 자라는 땅에서 태어났다. 해산물 빠에야는 이후 지중해 연안과 관광의 이미지 속에서 세계인이 기억하는 얼굴이 되었다.
이 차이는 빠에야를 더 입체적인 음식으로 만든다. 빠에야는 발렌시아의 향토 음식이면서 스페인의 대표 음식이고, 농촌의 쌀 요리이면서 지중해의 해산물 요리로도 기억된다. 한 음식 안에 지역의 자부심과 국가의 이미지, 현지의 식탁과 여행자의 상상이 함께 놓여 있다.
빠에야를 통해 보이는 스페인은 하나의 색으로만 정리되지 않는다. 이 나라에는 무어인이 남긴 물길과 쌀이 있고, 발렌시아의 논과 들판이 있으며, 지중해의 해산물과 사프란의 황금빛이 있다. 큰 팬을 가운데 두고 함께 기다리고 나누어 먹는 생활 정서도 있다. 빠에야가 오래 사랑받아온 이유는 이 모든 것이 한 팬 안에서 자연스럽게 만났기 때문이다.
쌀 한 알이 육수를 머금고, 팬 바닥에 소카랏이 남고, 사람들이 그 주변에 모이는 동안 빠에야는 스페인이 지나온 시간을 한 팬 안에 익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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