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기, 흰 떡이 ‘시작’의 언어가 되기까지

이지헌 전문기자

cnc02@hnf.or.kr | 2026-02-02 17:45:33

사진 = 한식진흥원


중요한 날이면 늘 함께한 흰 떡

백일이나 돌잔치를 떠올리면 상 위에 늘 하얀 떡이 있다. 개업 떡을 돌릴 때도, 이사한 집에 인사를 갈 때도 백설기 한 덩이는 이상하리

만큼 자연스럽다. 케이크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담백한 맛의 백설기는 왜 중요한 날마다 찾는 것일까.

여기에는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오래된 생활 감각이 숨어 있다. 백설기는 단지 먹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놓는 방식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색이 아닌 태도, ‘백(白)’

백(百)이란 완전함을 뜻하는 숫자이자, ‘모든’, ‘다’의 의미를 지닌 축복의 숫자이다. 백설기, 흰 쌀밥, 백일에 입히는 흰옷이 함께 떠오르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흰색이 지닌 신성과 청정의 이미지는 우리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우리 전통에서 흰색은 단순한 미적 선택이 아니라 정결·신성·액막이 같은 의미와 연결되어 왔다. 그래서 백설기는 예부터 티 없이 깨끗하여 신성한 음식이라는 뜻에서 아이의 백일·첫돌 같은 생애 의례에 빠지지 않았고, 사찰의 재(齋)나 산신제·용왕제 등 토속 의례에서도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즉, 백설기는 맛있는 떡이라기보다는 ‘바르게 올리는 떡’이었다. 달고 화려한 음식이 축하의 분위기를 키웠다면, 백설기는 오히려 반대로 요란하지 않게, 깨끗하게, 탈 없이 라는 소망을 담는 그릇에 가까웠다. 

이름은 달라도 같은 자리에 놓였던 떡, 백설기

백설기는 민속 자료에서 백설고, 백시리, 흰무리 같은 이름으로도 불렸다. 시루에 쌀가루를 안쳐 찌는 가장 기본적인 떡, 즉 설기떡의 한 형태였다. 

설기떡은 김해나 웅천 등지에서 출토된 시루 유물과 고분 벽화 등을 통해 1~2세기경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설기떡은 이미 일상 속에 자리 잡은 음식이었다. 이색(李穡)은 『목은집(牧隱集)』의 「영설고(詠雪餻)」에서 설기떡을 노래했고, 『지봉유설』에는 고려에서 쑥설기떡을 으뜸으로 삼는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설기떡이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당시에도 귀하게 여겨진 음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조리서에 이르러서야 ‘백설기’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쌀가루를 깁체로 쳐서 반죽하지 말고 안치라고 하였고, 빛이 눈처럼 희고 윤기가 나며, 더운 날에도 쉽게 상하지 않는 떡이라 설명되어 있다. 『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에는 밤설기, 『시의전서(是議全書)』의 막우설기 또한 같은 흐름 위에 놓인 기록들이다.

이처럼 이름은 시대와 문헌마다 달랐지만, 흰 쌀가루를 쪄 올린 떡은 늘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 잔칫상이 아니라 의례의 자리, 일상이 아니라 다짐의 순간이었다.

빚지 않는 떡이 가진 태도

백설기는 반죽을 치대지도, 모양을 빚지도 않는다. 쌀가루를 그대로 시루에 올려 찌는 방식은 이 떡이 장식보다 의도를 먼저 담아온 음식임을 보여준다. 

손을 많이 댈수록 맛이 깊어지는 음식이 있는가 하면, 백설기는 손을 덜 댈수록 뜻이 또렷해진다. 그래서 백설기는 ‘만들어지는 떡’이라기보다 ‘드러나는 떡’에 가깝다. 흰 결을 그대로 드러낸 표면 이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다짐을 조용히 올려 두었다. 

백설기 만드는 방법

멥쌀가루에 물을 섞어 손으로 비빈 후 체에 내린다. 
(쌀가루 100g당 물 15ml 정도)

설탕을 넣고 섞는다. 
(쌀가루의 1/10 분량)

찜통에 쌀가루를 고루 펴서 담는다. 
(찜통에 젖은 면보를 깔거나, 가장자리에 물을 묻혀 떡이 붙지 않도록 한다.)

물이 끓는 시루 위에 찜통을 올린 후 20-25분 정도 찐다.

5분간 뜸 들인다. 


오늘까지 이어진 ‘시작의 언어’

여전히 중요한 날이면 흰 떡을 나누며 “잘 시작해보자”는 메시지를 건넨다. 유행은 금방 바뀌지만, 잘 되고 싶다는 마음은 시대를 건너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가장 단순한 떡이 가장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그 떡이 맛이 아니라 마음을 운반했기 때문이다. 흰색이 필요해지는 순간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쿡앤셰프(Cook&Chef).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