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도심 속 벵골의 정체성: 포헬라 보이샤크

심예린 기자

cnc02@hnf.or.kr | 2026-04-24 18:11:26

'우리 뿌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뉴욕 벵골 공동체의 식문화 출처 : AI 생성이미지

[Cook&Chef = 심예린 기자] 화려한 네온 사인과 이주민의 삶이 켭켭히 쌓인 뉴욕 맨해튼에서 음식은 단순히 배를 불리기 위해서 보다, 자신을 잃지 않게 붙들어 주는 마지막 닻과 같다. 

매월 4월 중순, 뉴욕 퀀즈의 잭슨 하이츠(Jackson Heights)나 브루클린의 켄싱턴(Kensington)거리에서는 평소와 다른 낯설 풍경이 연출된다. 원색의 사리(Saree)를 입은 여성들과 전통 의상 파나비(Panjabi)를 갖춰 입은 남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바로 벵골(방글라데시 및 인도 서부 서벵골주)의 새해 첫날인 '포헬라 보이샤크(Pohela Boishakh)'를 축하기기 위해서다. 

도시 속 평온한 고향 안락함 '판타 바트' 

출처 : AI 생성이미지

벵골인에게 새해 음식은 뿌리를 확인하는 신성한 의식과 같다.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이 즐비한 뉴욕 한복판에서 그들이 이날 가장 간절히 찾는 음식은 역설적으로 가장 소박한 '판타 바트(Panta bhat)'다.

이는 저날 지어둔 밥에 차가운 물을 부어 하룻밤 동안 살짝 발효시킨 음식이다. 언뜻 보면 우리네 어르신들 입맛 없을 때 찾는 '물에 만 밥'이나 보리굴비에 곁들이는 '녹차물 밥'과 같다. 하지만 그 속에는 벵골 특유의 기후와 역사가 담겨 있다. 더운 날씨에 밥이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물에 담가두었던 지혜가 이제는 뉴욕의 최첨단 아파트 주방에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재현된다. 

이 소박한 밥 한 그릇 바삭하게 갓 튀긴듯 구워낸 '일리쉬(Iish)' 생선의 궁합을 말할 것도 없다. 벵골인들에게 일리쉬는 생선 그 이상의 상징을 가진다. 갠지스강의 축복이라 불리는 이 생선의 고소한 기름기와 판타 바트의 시원하고 담백한 맛, 여기에 곁들여진 매콤한 채소 무침인 '보르타(Bhortas)'는 뉴욕의 건조한 공기를 단숨에 습하고 활기찬 벵골의 강가로 바꿔놓는다. 

출처 : AI 생성이미지

낮선 땅에서의 생존법: 숟가락 대신 손끝으로 느끼는 고향

뉴욕 벵골 식당들에서 흥미로운 점은 세련된 포크와 나이프가 준비되었음에도, 많은 이들이 여전히 손을 사용해 식사를 한다. 이는 음식과 더 직접적인 교감을 원하는 그들만의 문화적 자부심이다. 손끝으로 밥의 온도와 질감을 느끼고, 생선 가시를 발라내며, 보르타를 정성껏 버무리는 과정 그 자체는 하나의 명상이자 예술적 의식이다.

절구를 꺼내 향신료를 직접 으깨고, 갓 짜낸 겨자유의 톡 쏘는 향을 입히는 행위는 벵골인들이 거대한 다문화 사회 속에서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기 위해 벌이는 일종의 '문화적 저항'이기도 하다. 

세대를 잇는 다리: 미식으로 전수된 정체성 

출처 : AI 생성이미지

포헬라 보이샤크의 진정한 가치는 세대 간의 연결이다. 뉴욕에 더 익숙한 2세, 3세 아이들도 이날만큼은 부모의 손을 잡고 벵골 음식의 매운맛을 배운다. 매운 보르타를 한입 먹고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부모님이 들려주는 갠지스강의 전설과 고향 집 마당의 망고 나무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들은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벵골의 피를 느낀다.

음식은 국경을 넘을 때 가장 먼저 변하고 타협하기 쉬운 문화지만, 동시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유전적 기억이기도 하다. 뉴욕의 벵골인들은 이 잔치를 통해 아이들에게 말한다. 너희가 어디서 무엇이 되든, 이 물에 만 밥 한 긋의 시원함과 겨쟈유의 알싸함을 기억한다면 너희의 뿌리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Cook&Chef / 심예린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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