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영의 한식탐구] 버려지지 않던 물, 조선의 부엌을 살리다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 2026-03-09 16:46:28

밥물과 쌀뜨물, 그리고 생선밥까지 — 고문헌 속 곡물 물의 활용과 한식 조리의 지혜 [사진=만개의레시피/ 쌀뜨물]

사라진 부엌의 물, 밥물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현대의 부엌에서 쌀을 씻고 밥을 짓는 과정에서 나오는 물은 대부분 버려진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부엌에서는 이 물이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가마솥에 밥을 짓던 시기, 밥이 어느 정도 익으면 물을 따라내고 뜸을 들이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는데, 이때 생기는 물이 바로 ‘밥물’이다. 또한 쌀을 씻는 과정에서 나오는 ‘쌀뜨물’ 역시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곡물을 주식으로 삼았던 조선 사회에서 이러한 물은 단순한 부산물이 아니라 음식의 일부였다. 고문헌 속 조리 기록과 생활 자료를 살펴보면, 밥물과 쌀뜨물은 국과 죽, 발효 음식, 그리고 생선밥과 같은 음식의 조리에까지 활용되며 조선의 식생활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사진=위키백과 / 밥물]

밥물의 탄생 - 가마솥 밥 짓기에서 나온 조리 기술

조선시대의 밥 짓기는 오늘날과 같은 흡수식 조리가 아니라 다수(多水)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쌀을 솥에 넣고 넉넉한 물을 부어 끓이다가 밥이 어느 정도 익으면 물을 따라내고 뜸을 들였다. 이때 따라낸 물을 밥물이라 한다.
이 물에는 쌀에서 나온 전분과 수용성 영양소가 녹아 있었다. 곡물을 귀하게 여겼던 농경 사회에서 이러한 물을 버리는 일은 거의 없었고, 다시 음식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곡물의 물까지 음식으로 순환시키는 이러한 방식은 조선 식생활의 특징 중 하나였다.

임원경제지와 규합총서의 기록

조선 후기 생활백과서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곡물을 활용한 다양한 조리법이 등장한다. 이 책에서는 곡물의 물이나 곡물 국물을 이용해 음식을 만드는 사례가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곡물에서 나온 물을 음식의 일부로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규합총서(閨閤叢書)와 같은 여성 생활 지침서에서도 쌀을 씻은 물이나 곡물 물을 조리에 활용하는 사례가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쌀뜨물은 채소를 씻거나 국을 끓이는 데 사용되기도 했으며, 곡물 음식의 조리에도 활용되었다. 이는 곡물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식생활에서 식재료의 모든 부분을 활용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밥물과 어물의 결합

밥물 활용을 설명할 때 중요한 음식이 바로 생선밥이다.

생선밥은 생선을 삶거나 끓여 나온 국물을 밥 짓는 물로 사용하여 밥을 짓는 방식이다. 오늘날의 해물밥이나 생선솥밥과 유사한 조리법이다.
이 조리법은 특히 해안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생선을 삶은 뒤 남은 국물을 그대로 버리지 않고 밥을 짓는 데 활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생선의 감칠맛
쌀 전분의 부드러운 질감
단백질과 탄수화물의 결합

이 동시에 이루어져 영양과 풍미를 높이는 음식이 만들어졌다.

조선 후기 음식 기록에서도 육류나 생선의 국물을 이용해 밥을 짓는 조리 방식이 등장하며, 이는 밥물이 단순한 부산물이 아니라 요리의 핵심 재료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쌀에는 탄수화물뿐 아니라 다양한 영양소가 포함되어 있다.
쌀을 씻거나 끓이는 과정에서 일부 수용성 성분이 물로 이동한다.
밥물과 쌀뜨물에는 다음과 같은 성분이 일부 포함된다.

전분
비타민 B군
미량 미네랄
아미노산 일부

특히 전분은 빠르게 흡수되는 에너지원으로 작용하며, 이러한 이유로 과거에는 밥물로 만든 미음이나 죽이 병자식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생선밥의 경우 여기에 생선 단백질과 아미노산이 더해져 영양적으로 더욱 균형 잡힌 음식이 된다.

현대 식탁에서의 활용

오늘날 전기밥솥을 사용하는 환경에서는 밥물을 따로 얻기 어렵다. 그러나 쌀뜨물이나 곡물 물은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국물 요리의 육수로 활용
죽이나 미음의 재료로 활용
채소 세척이나 식기 세척
해물 육수로 밥 짓기

최근 레스토랑에서 인기 있는 해물솥밥이나 생선솥밥 역시 이러한 전통 조리 원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한 부엌의 전통

조선시대의 부엌에서는 식재료의 모든 부분이 음식으로 순환되었다. 밥물과 쌀뜨물 역시 버려지는 물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재료였다.

이러한 조리 방식은 오늘날 ‘제로 웨이스트 요리’와도 연결된다.
작은 물 한 그릇에도 음식 문화와 삶의 태도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전통 부엌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지혜는 현대 식생활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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