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영의 한식발효] 술이 아닌 ‘장’으로 시작된 조선의 식탁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 2026-03-19 23:58:03

『계미서』로 읽는 15세기 식문화 구조 [사진 = 『음식고전』은 『계미서』를 비롯한 조선시대 고조리서를 통해 전통 식문화의 원형을 조명한 자료집이다.]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조선 전기, 15세기 전후로 추정되는 조리 기록 『계미서(癸未書)』는 현존 고조리서 계열 가운데에서도 구조적으로 매우 이례적인 성격을 지닌 자료다. 이 책은 본래 별도의 서명을 갖고 있지 않았으나, 책 말미에 ‘계미서’라는 표기가 크게 남아 있는 것을 근거로, 궁중음식연구원 한복려 원장이 이를 책명으로 명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계미서』라는 이름 자체가 후대에 부여된 것이며, 이는 해당 자료를 학술적으로 정리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붙여진 명칭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책이 주목되는 이유는 단순히 오래된 조리 기록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구성 방식이 기존 고조리서와 분명히 다른 방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조리서는 술 제조법을 앞세우거나 중요한 위치에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술이 단순한 기호식품을 넘어 의례와 교류, 향연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미서』는 이러한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이 책은 장 담그기를 가장 먼저 다루고, 술은 가장 마지막에 배치한다. 이 차이는 단순한 편집상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식생활의 중심축이 어디에 놓여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로 읽힌다.

특히 『계미서』에 등장하는 “결수오즉(結水五則)”이라는 개념은 이 책의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는 물에 관한 다섯 가지 원칙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물의 상태와 처리 방식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이 내용이 단순한 조리 기술을 넘어 발효와 저장을 전제로 한 식문화의 기초 조건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장은 곡물과 미생물, 그리고 시간이 결합되어 형성되는 발효 식품이며, 이 과정에서 물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미생물 환경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따라서 물의 조건을 먼저 규정하고, 그 위에 장 담그기를 배치한 『계미서』의 구성은 ‘맛이 만들어지는 출발점’을 조리 이전 단계로 확장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장이 가장 먼저 기록되고 술이 가장 마지막에 위치한다는 점은, 조선 전기 식문화가 의례 중심이 아니라 생활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장은 매일의 식사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맛의 축이며, 술은 특정 상황에서 소비되는 부가적 요소로 기능한다. 즉 『계미서』는 일상의 식사를 지탱하는 구조를 중심에 두고 기록된 자료로 볼 수 있으며, 이는 다른 고조리서들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또한 『계미서』에는 고기 음식과 함께 털짐승류의 손질법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요리법을 기록한 수준을 넘어, 식재료를 확보하고 처리하는 전 과정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유통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냥이나 직접 확보한 식재료를 손질하고 저장하는 기술이 곧 식생활의 중요한 일부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계미서』는 조리서라기보다 생활 기술서의 성격을 함께 지닌 자료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음식이 ‘온반’이다. 온반은 오늘날의 국밥이나 탕반과 유사한 형태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 구성 재료를 보면 무청, 다시마, 소고기, 꿩고기 등이 함께 사용된다. 이 조합은 단순한 재료의 나열이 아니라 당시의 계절적 조건과 식재료 환경을 반영한 선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조선 전기에는 신선한 채소를 연중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어려웠고, 계절이 바뀌는 시기에는 식재료의 공백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장 가능한 무청과 해조류인 다시마, 그리고 동물성 단백질을 함께 사용하는 온반은 영양을 보완하고 신체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식사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보양식의 성격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의도된 ‘보양’이라기보다 계절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실질적인 식사 구조에 가까웠을 것이다.

결국 『계미서』는 조선 전기 식문화가 단순한 조리 기술의 집합이 아니라, 물과 발효, 저장, 계절 대응이라는 구조 위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장으로 시작해 술로 끝나는 이 책의 구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지다. 맛은 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물과 미생물, 그리고 시간이 축적된 결과로 형성된다는 인식이 그 바탕에 놓여 있다.

아직 『계미서』는 다른 고조리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가 축적되지 않은 자료이지만, 그 안에 담긴 구조를 살펴보면 조선 식문화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조선의 음식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계미서』는 분명한 방향을 제시한다. 그 출발점은 조리 이전, 곧 물과 발효의 환경 속에 있었다.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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